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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n Sep 12. 2020

자기만의 방 - 1

낯선 도시에서 집을 찾는 한 달의 여정  |  Singapore

2017년 1월, 서울의 혹독한 겨울 추위를 뒤로하고 싱가폴에 도착한 뒤, 내 집을 찾는 한 달간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낯선 열대의 도시에서 시작한 두 번째 삶을 세팅할 겨를 없이, 관공서에 서류를 내러다니고 건강 체크를 받는 일주일의 짧은 준비기간으로 출근이 시작되었다. 싱가폴 사무실로 소속을 옮길 때 회사에서 relocation 비용을 지원해주기로 약속한 약 한 달의 시간이, 내가 호텔에서 버팅길 수 있는 최대의 유예기간이다.




퇴근하고 난 평일 저녁에, 그리고 주말에는 하루에 2-3군데씩 나의 집을 찾아 헤맸다. 처음엔 동네에 대한 감이 없어서 그냥 몸으로 부딪히느라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부동산 중개인과 만나기로 한 첫 약속에는 갑자기 내리던 폭우 속에서, 마침 사람이 아무도(!) 없는 대로변에서 헤매다 주소를 찾지 못해서 결국 가지도 못했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럴 경우 좀 기다리면 그치는 경우가 많아서, 굳이 빗속을 뚫고 길을 걷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 그걸 알리가 없는 나는 기를 쓰고 빗속을 헤매었고...)


또는, 좀 가격이 괜찮다 싶어서 가보면 인도 마을이거나 혹은 인도 마을 ‘옆’이었다. (싱가폴 안에 인도 마을이 따로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내가 그 동네를 부르던 말.) 나중에 알고 보니, 리틀 인디아라는 이름의 지하철 역을 기점으로로 그 인접해있는 역이며 지역이 모두 인도 마을 영역권이다. 이게 왜냐하면 인도 이야기를 하면 할 말이 많은데... 사실 이방인이 되어 낯선 나라를 부유하는 마찬가지의 입장을 겪어본 나로서는, 특정 인종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싶은 마음이 1도 없다. 그저 지금까지 겪은 바에 의해서, 내 집이 있는 동네로 인도 마을은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은 동네였다. 클라이언트의 새 프로젝트 사이트가 몇 년 동안 도시만 바꿔가며 계속 인도였어서, 일을 하면서 인도 사람들과 엮일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특유의 거짓말로 뒤통수를 맞아서 내가 문제의 책임을 뒤집어쓸 뻔하고, 터진 문제들을 수습하느라고 고생한 적이 많았다. 그리고 인도 마을은 다른 동네에 비해서 치안이나 위생이 별로 좋지 않다고 느꼈다. 싱가폴은 덥고 습한 기후 때문에 아무리 도시가 잘 관리되고 깨끗하다지만 바퀴xx가 많다.(으 싱가폴에 사는 동안 너무 많이 보아서 담기도 싫은 그 이름) 그래서 사는 사람이 잘 관리하지 않으면 집에 함께 살게 된다.


그리고 몇 번 인도 마을에 집을 보러 갔을 적에, 퇴근 후 평일 저녁 시간이라,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집주인을 기다리면서 밖을 서성이고 있으면 갑자기 지나가던 인도 아저씨들이 말을 걸어 잘 곳이 있냐고 물었다. 심지어 몰고 가던 차를 세워서 창문을 내리고 말을 걸며 타라고 한다. 하하.. 싱가폴은 치안이 좋아서 나만 제정신이면 뭐 별일은 없겠지만, 그 기분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하지만 시내 한가운데 위치해 있어 접근성이 좋고 인도 마을의 바운더리가 꽤 넓다. 그래도 살다보니 나도 꽤 무더져서, 나중에는 인도마을에 한복판에 있는 무용학원에도 다니곤 했다.

왜 이렇게 인도 이야기가 길어졌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집값이 높은 싱가폴에서는, 방만 빌리는 것이 (그리고 남들과 욕실, 거실, 주방 등을 공유하는 것이) 학생이 아니라 직장생활을 하는 expat에게는 보편적인 주거 형태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나도 경제적인 이유로 그 방식을 고려했다. 하지만 여럿이 함께 집들을 몇 군데 방문해 본 결과, 다른 낯선 이들과 한 공간에 사는 게 내게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친구도 가족도 아닌 사람들과 물리적으로는 가까이 살아야 하는 불편한 공존이 나와는 맞지 않았다.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잘 관리되지 않는 부엌과 욕실, 세탁기 등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운이 좋게 공용공간이 잘 관리가 되어있더라도, 부엌에 나갈 때도, 화장실을 갈 때도, 누군가 마주칠 수 있으니 집안에서 가벼운 차림으로 돌아다니지도 못할 불편할 삶을 생각하니 나에겐 영 맞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을 접었다. 무엇보다 ‘나의 기준’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초반에 가장 잘 한 판단 중에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회사 동료들은 왜 혼자 집을 얻어서 비싼 렌트비를 내느냐고 오히려 의아해했다. 아직 싱가폴에 친구가 없어서 그런 줄 알고 안타까워하면서, 마침 자기 친구가 사는 집에 방하나가 빈다며 소개해주려고 했다.(고마운 마음만 받았다...) 나에겐 맞지 않지만, 그만큼 보편적인 주거형태임이 분명하다.

매일 부동산 중개 어플과 웹사이트를 수시로 들여다보며 내가 감내할 수 있는 가격대의 집들이 뜰 때마다 찾아갔다. 여러 번의 헛발질과 맨땅 헤딩을 통해 조금씩 동네와 교통에 대한 감이 생겼다. 이제 헛걸음하기도 지쳐서, 인도 마을같이 나에게 의미없는 선택지는 아에 제껴버렸다. 역세권이 아니라서 조금 가격대가 괜찮은, 외국인보다는 로컬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 힙한 카페나 가게는 없지만 안정적인 분위기의 주거지역으로, 하지만 회사에 직방으로 가는 버스가 있는 동네로 어느 정도 타협을 하게 된다.

물론 회사 동료들에게 어느 동네가 괜찮으냐고 물어보기도 했었다... 출근한 지 한 달 동안은 집을 구했냐는 안부인사만 하루에 몇 번씩 들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비슷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집을 고르는 기준이 꽤- 주관적이고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느꼈다. 서양인과 동양인의 기준도 다르고, 싱가포리안과 외국인의 기준도 많이 달랐다. 남자와 여자의 기준도 너무 달라서, 그래도 좀 더 까다로운 기준을 기대하면서 주로 여자 동료들에게 물었다. 서양인 동료들은 인도 마을이 가격도 싸고 회사에서 가까워서 좋다며 (진심을 담아) 추천했고, 자기는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해서 교통비를 아낄 수가 있다며 앤 해서웨이를 닮은 독일인 동료가 기뻐하며 말했다. 그녀는 키가 나보다 30센치는 크니 함부로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유럽여행을 다닐 때 처음 내가 땅꼬마 같다고 느꼈고, 야간기차에서 유럽 여자들이 내 짐을 번쩍번쩍 들어서 올려줬던 걸 생각하면(...)


아 역시 서양인은 기준이 관대하군 하고, 나보다 몇 달 전에 입사한 홍콩인 동료에게 물었다. 홍콩에서 싱가폴로 처음 넘어와 가장 최근에 집을 구했다고 해서, 도움이 될까 자세히 물었다. 도심은 너무 비싸고 Eastcoast 쪽에 집을 구했는데, 이제 개발되기 시작한 지역이라 신축 건물이 많고 가격이 괜찮다고 추천했다. 헌데 초기에 정보를 얻을까 싶어 들날락거렸던 한인 커뮤니티 사이트에 검색해보니 동쪽에도 거시기한 지역이 있다고 한다. 언니들이 길 앞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붉은 조명이 켜진 가게들이 있다고 한다(!) 그 다음 날 물어봤더니, “아 거기는 그냥 한 골목인데, 그냥 빨리 지나가면 돼.“라고 했다. 하지만 난 겁도 많고 조심성이 많아서 아무래도 안될것 같았다. 나중에 보니 그 동료는 실내 암벽 타기를 취미로 하고, 회사에서 단체로 참가하는 마라톤 연습을 할 때도 뒤쳐지는 나를 잡아끌고 바닷가를 달렸던 씩씩한 철의 여인이라서 그랬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싱가폴에 도착한 지 한 달이 되던 내 생일날 내 집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호텔에서 방을 빼야 하는 날이 며칠 남지 않게 되면서 점점 불안해졌고 밤마다 간절히 기도했다. 내 집을 만나게 해 달라고. 타지에서 둥둥 떠다니며 부유하는 이 느낌을 종식시키려면, 퇴근하고 돌아갈 수 있는 호텔방이 아닌 나의 방, ‘자기만의 방’이 필요했다.

집을 보러 다닌 지 한 달이 되어가다 보니 지쳐가는 상태였다. 그리고 도시가 흥겨운 음악과 붉은색의 장식으로 가득 차고 축제 분위기로 뒤덮이는 설명절에도, 나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으로 무한 새로고침을 누르며 새로 올라오는 집이 없는지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큰 기대 없이 또 다시 약속을 잡고 보러 가게 된 집이다. 매번 실망하는 것도 이제는 지쳐서, 어느 순간부터는 기대치를 낮추고 스스로 담담해지려 애썼던 것 같다.

집을 보고 나서 잠시 생각한 뒤 오늘 바로 계약하겠다고 해서, 부동산 아줌마를 당황하게 했다. 부동산 아줌마가 집주인에게 연락하기 전에 나에게 거듭 확인하고도 또 물었지만, 그동안 수많은 집을 보았기에 나는 ‘이 집이다’ 하는 확신이 있었다. 계약서를 쓰기 위해 깊숙이 넣어두었던 보증금을 들고 오후에 다시 만났다. 의심이 많고 조심성이 많은 내가 돈뭉치로 준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싱가포르에서 은행계좌를 열 때 거주지를 증명하는 자료로 집 계약서류가 필요하기 때문에, 집이 없는 한 달 동안 은행계좌는 열지조차 못했다. 집이 있어야 계좌도 열고, 회사 월급도 받고(나중에 집이 생기고 한꺼번에 두 달치를 몰아 받았다), 이 모든 온전한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카드는 물론이고, 월급 입금 명세서, 심지어 은행 계좌 핀넘버 등 중요한 서류들이 아직 우편으로 집주소로 전달되는 전통적인 방식이라, 서울과 동시대 같지 않은 과거의 시간을 살고 있는 느낌도 들었다.

집주인은 좋은 사람이었고, 마음씨 좋고 유복해 보이는 중국인 계통의 싱가포리안이었다. 집주인의 딸과 부동산 아줌마가 영어로 계속 통역을 해서 계약을 무사히 마쳤다. 한국에서도 한 번도 안 해본 집 계약을 마치고 나니 긴장했던지 등에 땀이 났다.


(자기만의 -2’에서 계속​)

- 여행과 생활의 문턱,

  이국에서 찾은 나의 작은 집, Singap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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