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2 | 이국에서 찾은 나의 작은 집, Singapore
좀처럼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던 이방객이 그 도시의 생활자로 비로소 안착하게 되는 순간은 ‘집’과 ‘루틴’을 갖게 되고 나서다. 이국에서 나의 작은 집을 찾고 나서 해야 했던 일은, 서울의 일상에서 내 옆에 있었던 것들의 자리를 하나하나 채워나가는 것이었다. 그 루틴들이 채워지는 순간 서울에서처럼 이 도시에서도 비로소 생활한다고 느껴질 것이라 믿었다.
서양식 페이스트리가 귀한 나라에서 아침의 리추얼을 지켜줄 동네 빵집을 발견하는 일과, 입에 꼭 맞는 고소한 커피 원두를 살 수 있는 카페를 찾는 일, 퇴근길에 자주 들러서 저녁을 해결하던 타이 집과 생선 수프 가게의 단골손님이 되는 일, 주말에 설렁설렁 걸어 나와서 끼니를 채울만한 집 주변 식당들을 개척하는 일, 지도에서 발견한 서점들을 한 곳 한 곳 찾아가 보는 일, 처음 보는 열대과일들을 하나씩 먹어보고 그중에서 매일 먹을 것들을 추려보는 일 등등.
그러던 어느 고요했던 주말 아침에 무심코 물컵에 꽂아둔 꽃을 보고는 문득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구나’라고 느끼는 순간이 찾아왔다. 주변을 가꾸기 시작했다는 것은 어느새 한바탕 생존게임을 마치고 생활자의 모드로 들어선 것을 의미했다.
그때가 매일 출근하던 여행객이 일상의 문턱을 처음으로 넘은 순간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일상 반경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생활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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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집에는 완벽한 일요일 아침의 풍경이 있었다. 커다란 두 창이 두 개나 있어 아침이면 방에 햇살이 가득 들어와서 집 안이 비현실적으로 환해졌다. 아침이면 새소리가 들렸다. 마치 영화 인트로에 깔리는 배경으로 들었을 법한 정석적인 새소리였다. 서울에 다녀와서 밤늦게 도착한 다음 날 아침이면, 그 소리를 듣고서 삶의 배경이 바뀌었다는 것을 가장 먼저 체감했다. 새소리는 그 도시에 왔음을 알리는 고유한 시그널과도 같았다.
이 집은 작았지만 그 안에서도 부엌과 거실, 거실과 침실 사이에 제법 밀도 있는 경계가 존재했다. 부엌과 거실의 경계에는 아일랜드 조리대 겸 싱크대가 있었다. 그 아일랜드 너머는 거실이라고 부를 만한 공간이었다. 사실 그 크기로 친다면 몇 발자국채 되지 않았지만 거실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모습을 가졌다. 이 집에 사는 동안 한 번도 켜보지 않았던 TV와, 주로 책들을 옆으로 뉘어서 꽂아두었던 수납장, 물컵에 꽃을 꽂아서 놓아두던 작은 테이블과 2인용 회색 소파가 있었다.
가장 탁월한 위치에 놓여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이 2인용 소파였다. 그 소파를 경계로 거실과 침실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나뉘어졌다. 소파는 침대의 한쪽 끝을 받아주어서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소파로 인해 침대는 3면이 막히게 되었고, 그래서 침대 위에서도 마치 침실 방에 있는 것 같이 아늑하다고 느꼈다. 이 회색 소파 위에 정작 앉는 일은 드물었지만 방의 훌륭한 경계가 되어주었고, 침대 위에서 책을 볼 때에 비스듬히 기대어 두는 받침대로 더 많이 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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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에는 책상이 없었다. 그래서 아일랜드 조리대를 아쉬운 대로 책상처럼 썼다. 인덕션의 빨간 열기가 식을 때까지 기다리고, 싱크대 안으로 물건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물기를 열심히 닦으면서 포개 놓은 식기들과 사이좋게 공간을 나누어 썼다. 그러면서 훗날 책상을 가진다면 이 모든 물건들을 다 올릴 수 있도록 6-8인용쯤 되는 아주 커다란 책상을 갖고 싶다는 로망을 품었다. 식탁이 아닌 작업용 책상으로. 언젠가 한쪽에서는 잡지 대여섯 권을 어질러놓고 한쪽에서는 그림을 그리다가, 배가 고프면 이 모든 것을 치우지 않고 한쪽에서는 밥을 먹으리라 하고.
아일랜드 싱크대 위에는 전날 미리 사둔 빵이 항상 올라와 있었다. 빵은 나에게 행복감과 직결된 중요한 아침 리추얼과도 같아서, 혹시라도 빵이 떨어지지 않도록 부지런히 채워두었다. 이곳의 빵집들은 대부분 페이스트리류보다는 고기 등으로 속이 꽉 차 있는 식사빵을 팔고 있고, 나는 마음에 드는 빵집을 찾기 위해 새로운 동네를 갈 때마다 빵집을 들렀다. 오랜만에 시내에 나가는 날이면 가장 좋아하는 페이스트리 집에서 심사숙고해서 몇 개를 골라왔다. 집 근처 반경을 벗어나고 싶지 않은 날이면 rice dumpling과 포르투갈식 에그타르트를 동시에 파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어떤 가게가 빵의 안정적인 공급처가 되어주곤 했다. 나는 dumpling 가게에서 항상 에그타르트를 사가는 단골손님이 되었다.
이 집의 가구들은 모두 집에 원래부터 있던 것들이다. Fully-furnished라서 침대도, 소파도, TV장도, 의자도, 아일랜드 조리대도, 커튼도 모두 이 집에 속한 것들이었다. 이곳에서는 원래 있던 것들로도 얼마나 삶의 반경이 충분할 수 있는지를 경험했다. 비싼 선반장이나 번듯한 책상과 의자가 없어도 이국에서의 은신처가 되기에 충분한 집이었다. 내가 산 것이라곤 이케아에서 산 스탠드와 이불 커버, 물컵같이 소소한 물건들이 전부였다. 열기가 식은 인덕션 위에서 그림을 그리고 소파의 등받이를 책 받침대로 쓰면서도 항상 이 집이 가진 생활 반경 안에서 충분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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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벽은 흰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는 아무거나 마구 붙일 수 있었던, 벽지가 아닌 그 맨 흰 벽을 그리워했다. 그 흰 벽은 훌륭한 생각의 캔버스가 되어주었다. 막 끄적거린 스케치들, 영감을 주는 문장들, 가게에서 집어온 감각적인 명함, 스크랩해놓은 잡지의 한 페이지, 좋아하는 가구 브랜드의 카탈로그 등등.
그리고 이곳에 올 때의 비행기 편 티켓을 함께 붙어 두었다. 오후의 햇빛이 강하게 들어오는 집이라서 그런지, 1년이 지나니 빛이 바래고 잉크가 날아가고 없어져 마치 아득한 먼 옛날 같이 느껴졌다. 집이 익숙한 일상이 되었을 때도 그때의 마음을 기억하려고 했다. 처음 시작의 모습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어설프고 초조하고 겁먹은 얼굴도 나고, 익숙하고 능숙해진 지금의 나도 나라는 의미로, 그런 모든 나를 보듬고 수용한다는 의미에서였다.
어쩌면 나는 ‘나’를 만나기 위해 싱가폴에 간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나의 세계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곳은 내가 처음으로 갖게 된 자기만의 방이었다. 항상 동생과 방을 함께 써왔기 때문이다. 그 이국의 작은 집에서 심심하고도 고요한 혼자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 자신과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나를 알게 되었고, 나와 더 친해졌다. 10대와 20대는 내가 가진 성향들을 부정하는 마음과 온통 대립해 온 시간들이었는데, 싱가폴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다시 돌아올 무렵에는 긴 대화 끝에 나와 화해한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 이국의 작은 방에서였다. 처음으로 집에 혼자 남겨진 너무 많은 그 고요한 시간을 어떻게 주체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부터 내가 가진 사소한 눈을, 공간을 자세히 관찰하고 묘사하고 기록하는데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의 세계가 그 방 안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그 방 안에서 시작된 글과 그림들의 기록으로 나의 두 번째 세계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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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집의 기록
Balestier Rd, Singapore, 2017-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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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 집을 구할 때 맨 땅에 부딪힌 기억 때문에 몇 가지 정보를 조금 남기면, 2018년 당시 살고 있던 집의 월세는 1800 SGD(약 150만 원)였다. 역세권에 있지 않아서 스튜디오 플랫 치고는 저렴한 편에 속했다. 10평을 약간 넘는 정도의 크기이며, 그보다 작은 유닛은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5-7평가량) 집을 구하러 다닐 때 보지 못했으니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그 이하의 금액으로는 방만 빌리는 shared flat에 살아야 하는데, 나의 경우에는 그 flat의 방들을 보러 다니다가 아무래도 개인 공간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되어 방 대신 집을 얻었다. (shared flat의 화장실이 딸린 안방도 입지에 따라 1400-2000 SGD정도인 것을 감안.) 하지만 expat들에게 플랫 셰어는 꽤 보편적인 주거형태이다. 직장 동료들은 혼자 사는 나를 도리어 안쓰러워하며 친구네 플랫에 방이 났다며 종종 소개시켜 주려했다.
싱가폴은 주거비가 높다 보니 살아가는데 드는 고정비용이 높은 편이다. 당시에 나는 외국계 설계사의 한국 지사에서 일하고 있다가, 사정상 아시아권의 다른 지사로 옮겨야 했는데 그 때 알아본 싱가폴의 주거비는 한국의 2배 이상, 홍콩은 약 3-4배 정도로 체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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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다락
100년 된 빅토리안 하우스에서 지낸 여름, Lond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