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왕 <황조가>
코로나로 외출도 마음 편히 할 수 없는 날이 계속되고 있다.
냉장고를 열었더니 마땅히 먹을 것이 없었다. 필요한 것들을 간단히 메모한 후 오랜만에 대형마트로 장을 보러 갔다. 한국 못지않게 이곳 일본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Costco와 IKEA 건물, 그리고 자잘한 상점들이 입점해 있는 쇼핑몰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몇 시간을 걸었더니 다리가 묵직해졌다. 어디서라도 쉬고 싶지만, 실내 음식점이나 카페를 들어갈 용기는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더워지는 섬나라의 6월 날씨에 탈수를 방금 마친 세탁기 속의 빨래처럼 몸이 베베 꼬였다. 그렇게 몇십 미터를 더 걷다, 마침내 테라스가 있는 카페 하나를 발견했다.
"어머, 얼른 가서 자리 잡아야 해요."
그때까지도 힘이 없어 터덜터덜 걷던 나는 무슨 힘이 났는지 멀리 보이는 카페를 향해 돌진했다. 들어가자마자 자리를 잡고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얼음을 얼마나 가득 담았는지 걸어오는 내내 커피를 쏟을까 조심조심, 쟁반을 든 두 손은 물론 운동화를 신은 두 발에도 온 신경이 쏠렸다.
"히야아~ 이제 살 것 같아요. 너무 맛있다."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아니, 마셨다기 보단 말라있던 목에 '꿀꺽꿀꺽' 들이켰다. 시원한 것이 들어가니, 이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쇼핑몰 건너편의 주차장 건물 위로 끝없이 펼쳐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하얀 구름이 ‘동동’ 떠 있는 예쁜 하늘이었다.
바로 그때 건너편 건물 난간에 있는 비둘기 한 쌍이 눈에 들어왔다. 1.5의 시력을 몇 안 되는 자랑거리로 여기는 나에게도 워낙 먼 거리였던 터라 뭘 하는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가방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 줌을 당겨 보았다.
어쩜! 두 녀석은 서로의 얼굴을 연신 비비며 부끄러운 듯 몸을 앞으로 옆으로, 또 뒤로 움직이며 꽁냥 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인간인 내가 보아도 부러울(?) 정도였다.
어머! 저 녀석들 좀 봐!
진짜 웃긴다.
짝 없는 사람이 보면 질투하겠다.
휴대폰 화면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언니가 놀라며 웃었다. 수컷인 듯한 비둘기 한 마리는 암컷 주위를 춤추듯 걸어 다니더니 다시 다가와 얼굴을 비벼댔다. 새들의 언어와 교감 방식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지만, 그냥 좋아 보였다. 이 분위기는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한 쌍의 모습이었다.
커피 마시는 것도 잊어버리고 비둘기들에게 몰입했다. 사진만으로는 아쉬워 동영상도 찍었다. 영상을 기록하며 멀리 있는 녀석들을 지켜보고 있는데, 너무 자연스럽게 <황조가>가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나라 입시 교육의 힘이란…….
한자의 뜻도 모르고 열심히 외웠던 시가 주문처럼 중얼중얼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翩翩黃鳥(편편황조)
雌雄相依(자웅상의)
念我之獨(염아지독)
誰其與歸(수기여귀)
펄펄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
외로울사 이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황조가>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개인의 서정시라고 알려졌다. 안타깝게도 원래의 노래는 전해지지 않고, 4언의 한역시만 남아있을 뿐인데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우리말로 풀이된 시가 더 익숙할지 모르겠다.
사랑했던 왕비 ‘송 씨’와의 사별, 이후에 맞은 두 계실(‘화희’와 ‘치희’) 사이의 불화로 어디에도 마음을 둘 수 없는 왕.
모두가 자신 앞에 머리를 숙이고 적어도 그 나라 안에서는 최고의 권력자이지만, ‘참사랑’의 축복을 받지 못한 사내의 깊은 탄식을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물론, ‘왕’의 자리에는 앉아본 적이 없어 유리왕의 심경을 모두 이해할 순 없지만.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이 또 샛길로 빠진다. 영화 <관상>의 대사 한 부분이 떠오른다.
“어찌 내가 왕이 될 상인가!
내가 왕이 될 상인가 말이야!”
다시 돌아와서. 세상에 아무리 많은 부와 명예, 사람들로 둘러싸인 풍요로운 삶을 살아간다 해도 인간은 결국 사람이다. 마음을 나누고 나의 모든 것들 드러내고도 부끄럽지 않은 존재와의 ‘사랑’을 바라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해 더욱 성숙하고 빛나는 삶으로 다듬어 가는 것이 또한 사람.
유리와의 통치와 업적(정치, 사상 등)은 논외로 하고, 이런 면에서 그는 퍽 외로운 사람이 아니었을까! 아름다운 소리의 대명사로 불리는 꾀꼬리를 마음 편히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비둘기들을 보느라, <황조가>를 떠올리느라 잊고 있던 아이스커피는 어느새 '얼음'이 사라진 그냥 커피가 되었다. 빈틈 따윈 없는 것처럼 차갑던 얼음이, 진한 향기와 맛으로 코와 혀를 자극하던 깍쟁이 커피가 조용히 하나가 되었다. 유리잔은 적정한 온도를 찾았고, 쌉싸름한 탄맛이 강했던 커피도 덩달아 순해졌다.
간절한 그리움과 타들어가는 애통도 언젠가는 이렇게 옅어지고 묽어져서 '평온함'으로 섞이게 될까. 참, 그렇게 되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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