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 <독을 차고>
“오늘은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를 할 거예요. 각 모둠 별로 앞으로 배울 시를 하나씩 정해 줄텐데, 각 시에 어울릴 것 같은 곡을 붙여서 부르는 거예요.”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국어시간은 흡사 음악 시간처럼 변했다. 우리는 모둠 별로 머리를 맞대고 앉아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슨 곡이 좋을까! 이 시에는 어떤 멜로디가 어울릴까!
내가 속한 모둠이 맡았던 시는 김영랑 시인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이었다. 우리는 일단 각자 시를 읽어보기로 했다. 울림이 참 예쁜 시였다. ‘햇발’ 돌담에 와서 속삭이는 햇발과 풀 아래에서 웃고 있는 샘물이라니! 따뜻하고 동글동글한 봄날의 시골집 풍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밝고 맑은 멜로디가 필요했다.
누군가 그때 허밍으로 어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안타깝게도 노래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 곡을 노가바 하기로 결정했다. 네 명의 모둠원이 만장일치로 정한 곡에 시를 한 줄 한 줄 가사로 붙여가며 함께 불렀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 같이~”
마침내 어깨가 들썩일 만큼 신나고 예쁜 노래가 완성되었다. 부를수록 작고 예쁜 동그라미가 입에서 입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며 떠다니는 것 같았다. 다른 모둠에서 우리의 멋진 완성작을 미리 듣지 않도록 최대한 작은 소리로 입을 맞춰가며 연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모둠 역시 노래를 만드느라 바빠서 정신이 없었을 텐데 괜한 걱정을 했다.)
그렇게 십 여 분 연습을 한 후, 우리는 선생님이 나눠준 커다란 전지에 시를 적었다. 시화처럼 종이의 아래쪽에 돌담이 있는 초가집도 그렸고, 색 사인펜으로 우리 나름의 해석과 감상도 추가했다. 교실 앞에 나가 반 친구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던 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던 겨울 방학, 친한 친구 넷과 함께 찾아갔던 영랑생가(전남 강진 위치)에 갔다. 당시 나와 같은 모둠이었던 한 친구와 함께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만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을 불렀다. 우리가 만들었던 그 노래를! 그날은 처마 끝에 고드름이 얼 정도로 매우 추운 날이었는데, 우리의 노래는 그칠 줄을 몰랐다. 하늘은 쨍하게 파랬고, 해는 눈부시게 반짝였다. 열여섯 살 네 소녀의 웃음소리가 돌담을 넘어 흙마당 사방으로 퍼지던 날이었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시인의 필명 ‘영랑’처럼, 김영랑(본명 김윤식) 시인은 서정적이고 향토적인 운율이 살아있는 아름다운 시어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쓴 다른 시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를 보면 누구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생가에서 처음 보았던 시인의 생전 사진자료를 보며 사실 좀 놀랐다. 이름에서 연상되었던 이미지와는 달리, 한복을 입은 중년의 남성은 굳게 다문 입과 힘 있는 눈썹, 상대를 제압할 듯한 강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사진이었지만 시인의 에너지에 압도되고 말았다.
저렇게 강한 눈빛을 가진 사람에게서
이렇게 보드라운 시어가 나올 수 있었을까!
몇 번이나 사진 속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집에 돌아와 그의 다른 작품도 열심히 찾아보았다. 그리고 다른 작품들에서, 생가에 걸려있던 사진 속 시인의 얼굴에서 느꼈던 강한 기운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중반까지 발표된 김영랑의 시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흔히들 일제의 탄압에 맞선 저항시인으로 알려진 윤동주, 이육사와 한용운 시인의 이름과 함께 평가받거나 거론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시를 주로 썼던 그에게도 ‘독’을 품은 시어로 일제의 탄압에 맞선 시기가 있었다. 《독을 차고》 《거문고》 《두견》 등 비장하고 결연한 작품을 썼던 때가...
우리말(한국어) 사용이 완전하게 금지되었고, 수많은 문인들의 변절이 계속되었던 일제 강점기 통한의 시절.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그는 1941년부터 광복이 되기 전까지 아예 붓을 놓기도 했다. 내 나라 말을 쓰는 것 자체가 죄로 여겨졌던 애끓고 처절한 시대에 시인은 일본어로 된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초기 작품 속 토란잎 위로 동글동글 퍼지는 빗방울처럼, 쫑쫑쫑 무리 지어 어미 닭 뒤를 쫓아가는 노란 병아리들처럼, 평화롭고 예쁘고 고운 우리의 봄, 우리의 마당을 시인은 마음껏 노래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시대의 아픔을 감히 어떻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누구보다 우리말의 맑고 투명한 운율을 아름답게 읊던 시인에게서 노래를 앗아간 시대가 생각할수록 분하고 원통하다. 순수하고 해맑게 불렀던 우리들의 노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을 빼앗긴 듯.
<독을 차고>
김영랑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훑어 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고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 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 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 임을
‘허무한듸!’ 독은 차서 무얼 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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