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구 <사평역에서>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한 딸은 늘 고향이 그리웠다.
8남매의 둘째, 딸 중에는 첫 딸이었기에 일찍이 취직을 했다. 버스를 타고도 여섯 시간이 넘어야 닿을 수 있었던 멀고 낯선 땅 부산.
해가 지고 도시의 불이 하나둘씩 켜지면, 딸은 고향 집의 노란 백열등 전깃불이 그렇게도 그리웠다.
사무치게 엄마 아빠가 보고 싶은 날은,
동료들 몰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숨죽여 울었다.
"엄마, 아빠! 아무 걱정 마세요. 전 잘 지내요."
공중전화기 앞에 서서 퉁퉁 부은 눈으로 딸은 씩씩하게 말했다.
“오야오야, 우짜든지 밥 잘 챙겨묵고잉!”
엄마의 당부에 목이 메고 가슴이 메어 전화요금 핑계 대며 서둘러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딸은 얼마 되지 않은 돈을 꼬박꼬박 모아 집에 부쳤다.
오빠는 학생이었고, 부모님에겐 아직 가르쳐야 할 자식들이 여섯이나 더 있었다.
한창 갖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많던 나이에 참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좋아하는 봄, 보드라운 연둣빛이 산들을 수놓는 계절이 와도, 창밖의 신록을 보는 것조차 딸에겐 여유였고 사치였다.
하지만, 딸에게도 특별한 날이 있었다.
고향 집에 갈 때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뜨거운 바람으로 잔뜩 부풀린 머리에 헤어 밴드를 묶었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향한 버스터미널.
고향을 떠나 온 수많은 젊음들이 그곳에 몰려들었다.
어색한 화장과 처음 꺼내 신은 듯한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저마다 손에는 선물 꾸러미를 들었다.
나를 잊고 살아야만 하는 도시, 속내를 드러낼 수 없는 그곳에서 서러움이 복받쳐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딸은 고향집을 떠올렸다. 그리고 1년에 딱 두 번, 그렇게 집에 돌아갔다.
딸은 이제 일흔이 넘은 할머니가 되었다.
그리고 50년도 넘은 부산의 버스터미널의 여정을 이제는 딸의 딸이 이어가고 있다.
톱밥을 던지는 난로는 사라지고, 스마트폰으로 예약한 좌석을 찾으며 기차와 버스 안을 기웃거리고 있지만.여전히 한 두릅의 굴비와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 거리며…….
일흔의 딸은 마흔의 딸에게 말한다.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듯, 젊은 날의 자신에게 건네는 독백처럼. 끝내 돌아서야 했던 선물 코너가 내내 마음에 걸리는 딸에게 건네는 위로처럼.
그때는 다 그랬어.
산다는 게... 누구나 다 그랬어.
그러니 서러워할 것도
아쉬워할 것도 없어.
다 지나간다. 다 지나가.
남광주역을 모델로 지었다고도 하고,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역을 그렸다고도 하는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얼마나 고된지, 얼마나 시린지 굳이 말하지 않는다. 그저 꽁꽁 언 손바닥을 난로에 내밀고, 서로를 위해 한 줌의 톱밥을 건넬 뿐.
힘겨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모두에게, 자신만의 ‘사평역’은 있지 않을까? 누군가에게는 마을버스 정류장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기차역, 또 누군가에게는 공항일지 모를 우리들의 사평역.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 개인적으로도 참 좋아하는 곽재구 시인의 다른 작품들도 꼭 찾아보시길 권해요. 그 시들이 뜨거운 이 계절, 난로를 지피는 한 줌의 톱밥 대신, 얼음 동동 띄운 미숫가루 한 잔 같은 '작지만 시원한 위로'가 될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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