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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알 Sep 20. 2021

#13. 그 과 나와서 밥은 먹고 사니?

함민복의 <긍정적인 밥>

너 이과였다며? 근데 왜 우리 과에 들어왔어?


조용히 수업 준비를 하고 있는 나에게 선배 '코리 아부지' 물었다. '코리 아부지' 내가 지은 별명이었는데, 나와 친구  명만 아는 일종의 암호였다. 예를 들면 “코리 아부지 온다! 코리 아부지 화났다.” 같은.


90년대 tv에서 방영되었던 만화영화 <마법사의 아들 코리> 나오는 코리의 아빠는 마법사에겐 금기였던 인간과 결혼하였다는 벌로 마법세계에서 쫓겨났다. 마법능력도 대부분 빼앗기고 밤이 되면 부엉이가 되는 저주에 걸렸다. 인간의 모습에서 부엉이로 변하는 과정이 무척 극적인데, 숯검댕이처럼 짙은 눈썹이 하나로 이어지면서  몸은 거친 깃털로 수북이 덮인다. 특히  시선을 사로잡았던  짙은 눈썹.  눈썹 사이에 빈틈없이 총총 박힌 털들이  충격이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와 만난 선배  명의 얼굴을 보고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의 눈썹은 코리 아빠의 것과 무척 아 있었다. 설명이 길어졌지만, '코리 아부지' 내가   과에 들어왔는지 꽤나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는 과에서 존재감이 없는 아이였다. 다른 동기들처럼 10대 때부터 날고 기는 글쓰기 대회에서 상을 받은 경험도 없고, 동아리나 분과 활동에 열심히 나가지도 않았다. 선후배가 함께 모여 자신이 쓴 작품을 놓고 합평을 하는 분과 활동은 엄청난 부담이고 심판대였다. 쫄보였던 나는 '공개 처형장'에 서는 것이 두려웠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없었다.


어쩌다 내가 이 과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글 쓰는 걸 좋아했고, 문학 과목이 좋았다. 남들은 머리 아파하는 문법도 재미있었고, 한시나 오래된 우리말 옛시를 읽는 것도 즐거웠다. 무엇에 끌려서 대학 전공까지 그렇게 택했을까! 내가 좋아하는 과목을 실컷 공부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되는 거지. 단순하게 그 생각뿐이었다. 좋아하는 분야에 최선을 다하면, 그와 관련된 일도 하게 될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감사하게도 부모님은 자식들의 대학 진학과 전공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본인의 자유의지에 맡기셨다.


대학은 예상했던 것과 '퍽' 달랐다. 입학한 해부터 전국 대학에서 최초로 '단과대학 제도'를 도입했다고 학교에서는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분위기였다. 입시 때 내가 지원서에 적었던 전공은 내 소속이 아니었다. 아직 나는 과 소속이 아닌, 문과대학교 소속 1학년 ○○학번으로 통했다. 그래서였을까. 학부제보다 더 광범위해진 '단과제' 아래에서 그렇지 않아도 내성적이었던 나는 더욱 존재감 없이 학교를 오갔다.

 



다행히 2학년 2학기 때부터 본격적으로 들은 전공수업에서  선배들을 만나게 되었다. 신입생 모꼬지며 동아리 활동에 열심이었던 다른 동기들은 이미 선배들과 가까워져 있었다.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하고 담배를 피우러 나가고,  시험 족보를 주고받기도 했다. 반면, 나는  조용했다. 묵묵히 수업을 듣고 필기를 했다. 다들 지루해 하는 국어학 시간에도 조는 법이 없었다. 그림처럼 생긴 글자를 해독하는 일이 재미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나의 필기 스킬이 늘어난 . 지금도 듣고 정리하는 일은 제법 소질이 있는  같다. (직장에서도 인터뷰를  일이 있었는데, 나중에 정리한 페이퍼를 보고 상사가 엄지를 치켜세웠던 일이   있다.)

 

그런 내가 몇몇 선배에게 알려진 , 오로지 나의 필기 노트 때문이었다. 수업보다 풍물패 활동에 열심이었던 과의  친구에게 빌려준 노트가 다른 선배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노트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 손을 거쳤다. 그들은 저작권(?) 허락도 없이 복사물을 공유했다. 누군가는 술도 마시지 못하는 내가 즐겨 마시는 '페트병 녹차' 슴슴해서 무슨 맛으로 먹냐는 '참크래커' '아이비' 같은 비스킷을 사주었다.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고마워! 노트  봤어."라는 메모와 함께. 그렇게 조금씩 눈인사를 하고 식사도 하게 되는 선배들도 있었다. 과연, 20년이 지난 지금 선배들을 세워놓고 나를 아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 하면, 과연 몇이나 될까!




나에게 말을 거는 선배 중 하나가 '코리 아부지'였다. 그는 학생회장(과 대표였던가?)이기도 했는데, 그래서 나 같은 '아싸'에게도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대뜸 물은 질문이 "왜 이 과를 들어왔냐." 혹은 "졸업하면 뭐 할 거야?"라는 건데. 참 난처했다. 그나마 첫 번째 질문은 쉬웠다. "좋아서요", "그냥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아니면 "성적에 맞추다 보니" 수많은 대답이 있었고,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두 번째 질문은 모두가 불편해하는 질문이었다. 당연히 답을 해야 하고 생각해야 하는 질문이지만, 피하고 싶은 대상이었다. 서로에게 묻는 건 금기사항이었다. 그만큼 예민했던 질문을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묻는 코리 아부지. 역시, 코리 아부지!


그의 질문에 당황해하는 나를 보더니 94학번 선배가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거식아~ 그라고 거시기한 건 뭐하러 물어보냐. 안 그래도 '굶는 과' 들어와서 머리 아픈 중생들한테!"


풍문에는 학생운동을 하다 감방에도 다녀왔다는 선배는 '허허허' 웃으며 코리아부지의 어깨를  쳤다. 나에게는 조상님 같은  선배가 고마웠다.  번이나 얘기해도  이름을 잊어버린 건지, 아니면 귀찮은 건지 "거식아~ 거시기했냐?"라며 말을 걸던 사람이다. 학교의 상징과도 같은 문과대 건물  벤치. 그곳에서  교복 같은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다들 취업 준비를 한다고 토익 공부를 하고 온갖 자격증 공부에 매달리느라 도서관을 드나들었다. 하지만 선배는  벤치나 학과 사무실 소파를 지키고 있었다.

선배는 졸업하면
굶지 않을 자신이 있는 걸까.

지금 생각해보면 괜한 걱정이었다. 거시기 선배의 이름을 얼마 지나지 않아 주요 신문에서 발견했다. 소설가로 등단을 했고, 이름 있는 출판사를 통해 작품을 냈다. 물론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사진 속의 선배는 감방에 가기 전의 레전드 시절의 외모를 되찾은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몇몇 선배들이 우리가 거시기 선배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그러지 마라. 그래도 한 때 우리 학번에서 제일 꽃미모였어."라며 이야기하던 일이 생각났다.


거시기 선배를 비롯해 지금도 대형 서점에 가면 익숙한 이름들이 눈에 띈다. 베스트셀러 작가도, 해외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도, 방송에도 얼굴을 자주 보이는 이들도 있다. 굶는 과 출신 중 누구는 배를 곯지 않게 되었고, 누군가는 여전히 990원의 커피를 마실까 스탬프를 찍어주는 3천짜리 커피를 마실까 고민한다.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직업을 가져서 배를 곯지 않는 사람도 있고, 글과 언어를 다루며 역량을 인정받고 밥 따윈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사는 이도 있다. 과연, 하고 싶은 '글쓰기'를 하며 밥벌이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 역시 전혀 다른 직업을 택해 밥벌이를 해왔다. 그렇게 줄줄 외던 전공서적의 내용은 더 이상 내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다. 대신 좋아했던 몇 작품만이 입가에 맴 돌뿐이다. 하고 싶은 공부 실컷 했으면 된다고, 나는 그만큼 재능이나 열정이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고, 그 길을 가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 거라고. 수많은 이유를 대며 나의 현재를 합리화했다.


그럼에도 늘 서점 주변에서 서성이고, 반가운 이름을 보면 내용을 보지도 않고 책을 산다. 몇 천 원짜리 커피값은 이리 재고 저리 재면서 만원이 넘는 시집은 몇 권이고 산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작은 돈으로 매겨지는 그들의 피땀 눈물에 한숨이 날 때가 많다. SNS에 인증 사진을 올리기 위해 줄을 서서 찾아가는 브런치 카페에서의 한 끼 보다 싼 책이 오늘도 수없이 세상에 나온다. 그리고 소리도 없이 사라진다.


평생 글만 쓰면서 살고 싶은 이들이 '밥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은 과거에도 지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몇몇 소수의 이름 있는 작가들을 제외하고. 머리를 쥐어짜고 이불킥을 하고 다음 줄로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 메모장의 커서를 멍하니 들여다보다 버스를 놓치는 사람들이 여전히 살고 있다.


"일단 밥벌이를 해. 글쓰기는 취미로 하면 되잖아."


사람들은 말한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위해, 전업작가가 되겠다 말하는 사람에게는 "아직도 세상을 모른다.”라며 혀를 찬다.


그럼에도 그들을 응원하고 싶다. 녹록지 않은 현실 앞에서 내쉬는 뜨거운 한숨을, 그들의 처진 어깨를 다독이고 싶다. 일단 '밥 한 그릇' 잘 챙겨 먹으라고. 우선 밥을 먹고 힘을 내라고 말이다.

 


  

 <긍정적인 밥>


                          - 함민복      


시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사람들의 가슴을 덥혀주는 밥 한 그릇 같은 시를, 누군가는 지금도 쓴 눈물을 삼키며 쓰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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