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록 <의자>
그래서 안 돼. 내가 뭐랬어.
○○ 출신치고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니까.
처음부터 느낌이 이상했어.
버스에 앉아 집에 돌아가는 길. 상기된 얼굴로 통화하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온 버스에 울린다. 뭐가 맘에 안 드는지, 한 발로 버스 바닥을 ‘탁탁’ 치며 소리를 높인다.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혀를 끌끌 차며 통화를 이어간다. “사람이 그렇다니까. 절대 믿을 게 못 돼. 남의 말을 들을 줄도 알아야지!”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버스의 맨 뒤쪽 복도에 자리를 잡고 서 있는 내 귀에도 ‘쩌렁쩌렁’ 울린다. 퇴근 시각이 훌쩍 지났지만, 웬일인지 정류장마다 사람이 밀려든다. 자리는 날 것 같지 않고, 손잡이 하나를 겨우 차지한다. 앞으로 40분은 더 중심 잡기를 해야 할 듯싶다.
‘끼이익’ 갑자기 버스가 요란하게 멈춘다. 손잡이를 잡은 팔이 몇 센티미터는 늘어난 것 같다. 버스 안의 승객들은 놀라 소리를 지른다.
“아악! 아저씨이이!”
“아! 뭐야.”
“아이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버스 기사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승객들을 살핀다. 이어 씩씩대며 창문을 열고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아니, 이 노친네가!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예요! 지금 큰일 날 뻔한 거 알아 몰라!”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 성난 기사의 고함에 순간 버스 안은 조용하다. 투덜거리던 사람들이 입을 삐죽거리며 “무슨 일이야!” 창밖을 내다본다. 버스가 서 있는 곳은 횡단보도 바로 앞. 버스 불빛이 비치는 곳에는 다리가 풀린 듯 눈만 깜박이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이 서 있다.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한다.
“할머니가 신호 안 지켰나 보네.”
“뭐야, 빨간 불인데 건너고 있는 거야?”
“파란불에 다 못 건넌 것 같은데.”
상황 파악이 됐다는 듯, 너도나도 할머니에 대해 말한다. 누가 보면 원래 알고 있던 사이인 듯 옆자리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이러니까 나이가 들면 돌아다니는 것도 민폐라니까요.”
“설마 일부러 그러셨겠어요. 몸이 불편해 보이시는데…….”
기사 아저씨는 창문을 ‘확’ 닫고 다시 출발한다.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듯 “저렇게 다니는 노인들이 제일 무섭다니까요. 아 글쎄, 저번에는!” 라며 누구를 향한 하소연인지 모를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때다. 버스 중간 즈음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헛기침 소리.
“기사 양반! 아니, 제대로 사과를 해야 하는 거 아니요? 지금 승객들이 다 놀랐잖아요. 당신 때문에. ‘죄송하다’ 한 마디면 끝인가. 지금 모두 얼마나 놀랐는지 안 보여요?”
익숙한 목소리. 버스에 탔을 때부터 전화 통화를 하던 아저씨다.
“사람이 왜 자기 생각만 할까. 돌발상황에서도 승객들한테 피해 안 주고 운전을 잘해야 하는 게 기사님 일 아니요? 지금 내가 너무 놀랐잖아. 안 그래도 심장도 안 좋은데. 내가 큰소리에 얼마나 민감한지 알아요?”
아저씨는 화가 났는지 속사포처럼 쏘아댄다. 그의 말대로 승객 모두 놀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신경이 긴장되기 시작한 건 본인의 전화 통화 소음부터였다는 걸 왜 모를까. 너도나도 황당하다는 듯 아저씨와 운전기사를 번갈아 가며 쳐다본다.
“아 죄송합니다. 저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저런 노인들 만나면 아무리 운전 잘하는 사람도 어쩔 수 없다니까요.”
“아니, 그 말은 이미 들었고. 사과를 제대로 안 한 게 문제라고 그러는 거예요. 나는!”
기사(아저씨)와 승객(아저씨)의 끝이 나지 않는 넋두리. 옆에 함께 서 있던 교복 입은 학생이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는다. 왜 이토록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 걸까. 나의 사정 외에 타인의 말에는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 걸까.
(마음 하나) 분명 건널 수 있을 거라고, 깜박이는 초록 불을 보며 걷기 시작했지만, 고장 난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아 애가 탔을 할머니의 마음.
(마음 둘) 라디오의 유행가를 따라 부르며 운전하다 급브레이크를 밟고 식은땀을 흘렸을 운전기사의 마음.
(마음 셋) 혀를 차며 큰 소리로 통화할 수밖에 없는 나름의 사정이 있을 거라고 이해하려 애써보는 아저씨의 마음.
(마음 넷, 다섯, 여섯...)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승객들의 마음
누군가 이 마음들을 토닥여 줄 수 없을까! 혼자 살 수 없는 세상, 타인의 ‘석 자인 코’도 한 번 살펴볼 여유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힘없이 걸어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괜히 눈에 밟힌다. 멍하니 창밖을 보는데 누가 내 가방을 끌어당긴다. 앞 의자에 딸과 함께 앉아있던 아주머니는 내 옆 학생의 가방도 '톡톡' 쳤다.
“우리 이제 내려요. 여기 앉아요.”
“아 감사합니다.”
같은 마음이었을까. 학생과 나는 얼굴이 마주치자 멋쩍게 웃으며 나란히 앉는다. 서 있다 앉기만 해도 이렇게 좋은걸. 우리는 의자 같은 존재가 되어줄 수 없을까.
“싸우지 말고 살아라”
시인을 낳은 어머니의 말씀이 쟁쟁하게 울리는 밤이다.
<의자>
- 이정록(1964~)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조흔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 이정록 시인 : 1964년 충남 홍성 출생. 1993년《동아일보》 신춘문예 「혈거시대」 당선, 시집으로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풋사과의 주름살』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제비꽃 여인숙』 『의자』등. 시우화집 『발바닥 가운데가 오목한 이유』,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