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복이 많아 잘 될 거야...
이십여 년 품은 자식들이 하나둘 제 갈길을 찾아 나가고 창밖의 장미 넝쿨이 소녀 감성을 자극해 커피 한잔을 들고 멍 때리고 있다. 우연히 접하게 된, 50대 주부들이 그동안 육아하느라 묻혀두었던 꿈을 향해 재도전하는 영상이 계속 뇌리에 맴돈다. 90년대에 결혼하고 육아와 남편 뒷바라지하며 전업주부로 보낸 세월, 생활전선에 나서지 않고 오로지 가정살림과 육아에만 전념하도록 가장으로서 수고한 남편이 감사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잠시 묻혀두었던 삶과 꿈을 다시 일구어 내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린다.
내 삶의 시작은 경상도 아지메, 울 엄마다. 어머니 나이 마흔하나에 셋째 딸로 만나 내 나이 50에 사별한 울 엄마의 삶이 많이 궁금해졌고, 희미해져 가는 엄마와의 추억을 글로 남겨 그 위에 내 삶을 살포시 얹어볼까 싶다.
울 엄마, 경상도 아지메의 고향은 해주 정 씨, 농포 공파 집성촌인 경상남도 진주시다. 정확히 말하면 '까꼬실'이라 불리던 진주시 귀곡동 해주 정 씨의 '아씨'로 일제 점령기에 출생하였다. 전쟁 직후, 20대 후반에 가정용품 장사를 시작으로 사업에 뛰어든 울 엄마는 우연한 기회에 3대 재래시장 중의 하나인 광주 양동시장에 종업원 20여 명을 거느린 도, 소매 포목점으로 정착한 호남의 경상도인 사업가였다. 영, 호남지역갈등이 뚜렷했던 6,70년대에 호남 광주에서 <부산 상회>라는 상호를 내걸고 당당하게 포목점을 47년 동안 운영하셨던 어머니의 별명은 '경상도 아지메'였다.
역동적이고 활동적인 엄마의 기질과 침착하고 평온한 아버지의 기질 사이에서 나는 평화롭고 느긋한 아버지의 성품을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상황판단과 두뇌회전이 빠르고 추진력이 강해 남보다 한걸음 먼저 앞서가는 어머니의 삶이 언제나 숨 가쁘고 분주하게 보였다. 느긋하면서도 유능하고 늘 일관성 있게 현실을 즐거운 맘으로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삶이 어린 눈에도 더 좋아 보였다. 누군가가 내게 외양적으로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면 언제나 기분이 좋았고 그럴수록 더 닮고 싶었고 내 삶의 유일한 멘토로서 존경했고 그분의 발자취를 그대로 답습하고 싶었다.
아버지는 일본 점령기가 시작되던 무렵에 전주 최 씨 문열공 계 지평공파 집성촌인 황해도 안악군에서 기독교 집안이며 부농의 장손으로 출생하시어 평양에서 고등교육까지 마치셨다. 해방 직후 공산치하에서 평탄한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었던 아버지는 조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신앙생활을 위해 1,4, 후퇴 때 월남한 실향민이었다. 추석이며 설날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고향과 사무치게 그리운 친가에 대한 아버지의 넋두리를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세월은 드러나지 않는 깊은 그리움이었고 육신이 가져다주지 못하는 평안함이 보이지 않는 절대자에 의해 차곡차곡 채워지는 삶이었다.
지난 두 해 동안 겪은 팬데믹은 많은 삶의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팬데믹을 거치는 동안 내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남편의 당뇨관리였다. 이제 초기이다 보니 약물관리와 식이요법으로 관리할 수 있는 단계이긴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와 친해지면 치명타이기에 <당뇨>에 관한 공부에 집중하게 되었다.
유명 의료인들의 조언대로 여러 방법으로 시도해보고 얻은 소소한 경험담과 정보들을 주위에 조금씩 흩뿌리다 보니 벌 떼같이 많은 당뇨인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심지어는 당뇨 영양제, 당뇨식품, 당뇨 간식, 당뇨 고추장과 된장 등 자연에서 몸에 좋은 것들만 품은 자연친화적 유기농 식품 등에 대한 공동구매, 대리구매요청이 늘어났다. 지인들의 요청에 따라 레시피를 나누고 식단을 나누고 식자재 정보 등을 나누다 보니 어느 날 고객만족 감성 스토어 이커머스 오너가 되어 있었다.
"너희들은 장사만큼은 하지 말아라. 더욱이 장똘 박이는 되지 말아라"
경상도 아지메의 유언이다. 20대 초반에 기차 여비를 아껴 빨랫비누 3장으로 시작했던 엄마의 사업은 40대가 되기 전에 이미 가게 점원이 20여 명, 부엌의 친모가 대여섯이나 되는 대식구를 거느릴 만큼으로 자산이 증식되어 있었다. 사업가 어머니는 수익이 생길 때마다 광주의 요지의 부동산을 사모아 자산으로 챙겼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보험 넣듯이 아이들 몫으로 부동산을 사서 모았다. 하지만 70년 대 초반, 어느 사업가든지 한 번씩 겪는 위기처럼 어머니의 사업에도 적신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둘째 딸을 갑자기 의료사고로 잃어버리게 되는 고통을 시작으로 광주 양동 복개상가 건설을 위해 광주천변 가게들이 철거 및 이주하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후원하고 있던 한 사랍학교의 부지 매입에 얽히게 되면서 3850만 원의 부도를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업터전은 물론이고 만 20년 동안 사모았던 모든 부동산은 증발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나이 마흔여섯, 남은 것은 20평도 채 안 되는 월세 가게와 중학생 딸, 초등학생 작은딸 그리고 미취학 아동 두 아들, 아버지와 함께 모두 여섯 식구만 달랑 남았다. 위기에 강한 어머니는 초심으로 돌아가서 천 보따리 하나로 다시 '장사'를 시작하셨다. 어린 자식들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연필 한 자루 값, 교과서 값을 벌기 위해 오뚝이처럼 씩씩하게 일어섰다. 40 후반에 보따리 하나로 다시 도전한 여장부, 경상도 아지메는 16년에 걸쳐 네 명의 아이들을 대학교육까지 뒷바라지하면서 3850만 원의 빚과 그 이자를 모두 청산하셨다. 자녀들에게 사업만큼은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것이 이런 위기를 극복한 사업가 어머니의 다짐이었다.
현실의 불편한 부분을 뒤집어보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사업이 된다. 처음 요청받은 공동구매는 특허받은 대추 고추장과 대추 된장이었다. 고추장은 미디어 영상을 통해 천연당을 넣어 직접 만들 수 있었지만 된장은 한국으로부터 공수된 메주덩어리를 사다 시도해보았으나 실패만 거듭했을 뿐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만난 남가주 대추농장의 된장과 고추장은 맛도 좋고 품질도 정직해 혈당관리에 부담이 되지 않는 상품이었다. 늘어나는 공동구매 주문은 대리구매로 방문판매로 이어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한국에서 공수해 온 친환경 유기농 식품들을 직접 수매하여 이커머스 몰을 오픈하게 되었다.
한 스텝씩 올라설 때마다 사업가 어머니가 생각났다. 부인할 수 없는 어머니의 사업 DNA가 내 안에도 잠재되어 있었다. '내가 장사를 하다니' '나도 엄마의 딸이구나' 그토록 부담스러웠던 엄마의 강한 추진력과 빠른 상황판단력이 내 안에도 잠재하고 있었다. 고객만족 감성 마트 오너의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은 어머니의 삶의 투영이다.
커피가 차갑게 식었다. 따스한 카리스마가 깊이 우러난 어머니의 목소리가 그립다. 자식이 넘어질까 쓰러질까 한 발자국 미리 나서서 지푸라기, 돌덩이 치우시던 어머니, "실패해도 괜찮아" "실패하면 또 탈탈 털고 일어서면 돼... 너는 복이 많아 잘 될 거다" 긍정의 에너지를 원 없이 넣어주시던 어머니의 덕담이 너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