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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진 Jan 23. 2021

22. 이게 다 돈이야

노트와 펜이 많으면 공부를 잘할 줄 알았는데

"어휴 이게 다 얼마야 진짜! 너 이제 아무것도 사지 마." 서랍에서 나온 것들을 보며 엄마가 말했다.

미리 말하자면 나는 돈을 좋아한다. 돈을 쓰는 것도 좋아한다. 물건을 사는 것도 좋아했었다. 주식을 시작하기 전까진 그랬다. (그러고 보면 돈 쓰는 거 좋아하는 내겐 주식이 천직인지도 모르겠다) 과거 내가 제일 많이 샀던 것은 문구류였다. 노트, 다이어리, 스티커, 마스킹 테이프, 볼펜, 색연필, 크레파스, 사인펜, 형광펜, 편지지, 편지봉투 등등 문구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좋아했다. 코덕에게 하늘 아래 같은 색조는 없다면, 문덕에겐  하늘 아래 같은 종이는 없었다. 엄마의 말을 빌려 난 이건 이래서 사고 저건 저래서 샀다.

산 물건을 끝까지 쓰는 법은 절대 없었다. 다이어리도 귀찮아서 쓰다 안 쓰다를 반복하는 인간이 바로 나였다. 그럼 왜 이렇게 문구를 열심히 샀느냐. 원래 덕질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회피성 멘트일 뿐 실상은 달랐다. 나는 어떤 것에도 '덕질'할 만큼의 마음은 주지 않는다. 내가 문구를 사 모으는 이유는 이랬다. "왠지 그게 있어야 공부를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옛 어른들이 말하던 꼭 공부 못하는 것들이 필기류만 사 모으지 했던 바로 그것.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이어리를 사야 한 해가 더 풍족하고 바쁠 것 같았고, 그 위에 저 펜으로 써야만 못난 글씨체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 것 같았다. 그래서 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손에 넣었다. 그렇게 내 것이 되고 나면 서랍에 박아두고 잊어버렸다.

이 모든 것이 엄마에게 들통난 것이다. 다이어리와 스티커는 유행을 지난 지 오래였고 펜은 잉크가 말라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이게 다 얼마야 진짜. 최소 몇 백은 되겠다. 안 쓰고 처박아 둘걸 왜 산 거야 진짜. 이 돈으로 주식을 사놨어 봐." 엄마가 말했다. 엄마, 몇 백 아니고 몇 천이야.

내가 영영 안 쓸 것 같은 노트와 스티커들을 버리려고 내놓자 엄마는 "그거 왜 버려! 노트 깔끔하고 좋구먼. 버리지 마, 버리지 마."라고 했다. 나는 어차피 안 쓸 거니까 버리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엄마는 "엄마가 쓸 게. 엄마가."라고 말했다. 내가 엄마가 노트를 쓸 일이 대체 뭐가 있느냐고 타박하자, 엄마는 "확실히 너보단 엄마랑 아빠가 뭘 더 못 버려. 자식새끼들은 자기들 돈으로 산 거 아니라고 필요 없으면 바로  버리는 데 엄마 아빠는 우리가 번 돈이니까 더 못 그래."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나는 내 돈 주고 산 것도 많은데라고 했지만 엄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몇 개의 클리어 파일과 언제 쓸지 모르는 이면지들은 쇼핑백에 담겨 베란다로 쫓겨났다. 저것들은 재활용하는 날에 버려질 것이다. 그중에는 전공 책도 있었다. 2천만 원이나 내고서 받은 졸업장, 전공도 안 살릴 줄 알았다면 진작 자퇴할걸. 나는 엄마에게 등록금이야말로 아깝다고 그 돈으로 주식이나 사 둘걸 그랬다고 말하자, 엄마는 그래도 그건 다른 거라고. 남들한테 어디라도 나왔다고 말할 수 있는 거랑 고등학교까지만 나왔다고 말하는 거랑은 다르다고 했다. 나는 엄마에게 남들이 무슨 상관이냐고, 요즘 세상에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려다 말았다. 그 등록금마저도 엄마가 내준 엄마 돈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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