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에필로그
지난가을 한 아파트 단지 꽃밭에서 라미와 동락이를 처음 만났습니다. 여태 국화, 구절초, 천인국 같은 가을꽃들이 색색가지로 만개해 있는 짙은 가을이었습니다. 당시 사진들을 들춰보면 겨울에 거의 다다른 늦은 가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진녹색의 나무들이 프레임 안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도달하자마자 모습을 감추는 옅은 햇살과 낮과 저녁이 잘 구분되지 않는 도처의 흐림 속에 뚜렷한 공허함이 떠오릅니다. 그렇지만 사진을 하나씩 넘기다 보면 묵진한 고독이 옅어지고 그 위로 부드럽게 위안이 스며듭니다. 고양이들의 노랗고 하얀 부드러운 털처럼 따스한 위로가 사진 속에 담긴 것은 아무래도 그들이 제게 조용히 내미는 그것으로 인해 그를 바라보는 제 눈과 마음, 카메라를 잡은 저의 손에 따듯함이 전해졌기 때문이겠죠.
태어난 지 채 1년도 안 되어 보이는 작은 치즈 고양이 라미와 동락이는 꽃밭 한가운데 둘만의 세상에서 마치 한 몸처럼 동그랗게 몸을 붙이고 자고 있었습니다. 항상 비슷한 자리에서 꼭 껴안은 채 단잠에 빠져있는 라미와 동락이 앞에 동그랗게 쪼그리고 앉아있던 그때처럼 사진 속에 담긴 둘만의 보드랍고 단단한 세상을 바라봅니다.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않은 채로 그들은 무심하게, 그렇지만 누구나 그들을 헤치지만 않는다면 흔쾌히 받아들이는 널따란 마음으로 저를 안아주었습니다. 그 마음은 어떠한 기대, 욕심, 집착도 없이, 불투명하지만 햇살 너머로 모든 것이 비치는 얇은 커튼 같은 것으로 저로써는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유연함과 단단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게 풍성한 가을을 함께 보낸 동락이는 라미를 떠나고, 라미의 곁에는 아픈 엄마 고양이에게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던 동그란 아기 고양이 동구가 찾아왔습니다. 사실 라미가 동구를 찾아내 곁을 지키게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좀 더 사실에 가까울 듯합니다. 어찌 된 일인지 동구와 동구 엄마가 함께 사는 작은 구멍 속에 라미가 들락거리는 모습을 몇 번 본 이후로 동구와 라미만 남겨졌으니까요. 그렇게 동락이와 동구 엄마가 떠난 후 라미는 동구 곁을 지키며 동구 엄마가 주지 못하던 사랑을 나눠주었습니다.
낙엽이 떨어져 흙바닥을 색색으로 덮듯 차곡차곡 쌓아간 사진들을 넘기다 보면 계절의 흐름이 느껴집니다. 프레임을 가득 채우던 녹색은 사라지고 어느덧 구부정한 가지만 남아 멀뚱이 서있는 나무들과 땅을 덮은 노랗고 붉은, 기어이 희미한 갈색으로 돌아가는 낙엽들이 찾아옵니다. 변하는 건 계절만이 아닙니다. 조그맣던 고양이들이 커가고, 주먹만 하던 동구는 제법 어엿한 고양이다워집니다. 그저 몇 달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많은 풍경을 바꾸어 놓는다는 사실에 새삼 놀랍습니다. 조그맣고 날렵하던 라미가 어느새 왕발에 걸맞은 몸집의 커다란 고양이가 되었고, 그루밍이 어설픈지 회색 빛의 꼬질하던 동구는 어느새 호박빛 털을 깔끔하게 손질하여 노란 고양이가 되었습니다. 머릿속에만 어렴풋이 남아 겨울에서 봄이 오면 저편으로 녹아 흘러버렸을지도 모르는 이러한 기억들이 사진으로 남아있어 안심이 됩니다. 시간의 파도를 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되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에 큰 기쁨을 느끼지 않나 싶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은 이 순간에도 사진을 뒤적이며 당시의 감정을 곱씹어볼 수 있다는 것이 책장 가장 위에 놓인 채 먼지가 쌓이던 상자를 열어 낙엽처럼 노랗고 희미해진 손 편지를 열어보는 것만 같습니다.
그때의 저는 많이 외로웠고, 그들에게 받은 편지들에도 오래된 먼지처럼 희끗희끗 외로움이 쌓여 있습니다. 사진 속 라미를 보며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복잡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라미의 마음은 끝내 알 수 없겠지만 적어도 라미는 저의 마음을 돌아볼 기회를 주었습니다. 지금껏 외로워만 하며 사랑을 주지도 받지도 않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고양이들은 진심으로 외로워할 줄 알기에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사랑할 줄도 아는 것 같습니다. 혼자일 때 정말 혼자일 수 있고, 함께일 때 정말 함께일 수 있는. 그러하기에 스스로 마음을 동여매고 끙끙 앓지 않고 오고 가는 가벼운 바람처럼 외로움과 사랑을 산뜻하게 받아들이는 고양이들.
외로움은 사랑과 결코 떨어질 수 없으며, 그 사랑에는 끝없는 책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작은 고양이를 통해 보았습니다. 라미의 외로움과 사랑, 그리고 그것에 수반되는 결코 작지 않은 에너지를 간직하고자 합니다. 그 힘으로 봄 볕 아래 새싹처럼 쑥쑥 자라나 어엿한 고양이가 된 동구의 순수함, 넘치는 호기심과 두려움을 간직하고자 합니다. 그 힘으로 세상 누구보다 유연하고 여유 있는 삶을 살 줄 아는 고양이가 되어 돌아온 동락이의 단단한 중심을 간직하고자 합니다.
그들 앞에 가만히 쪼그려 앉아 눈을 맞추고, 동그랗고 보드라운 새하얀 바탕에 노란 치즈색 태비무늬 사랑을 기록할 수 있었던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