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부드럽지만 단단한 친절
사과를 딸 때 우리는 손을 부드럽게 활짝 편다.
반면에 위험한 적을 만났을 때는 재빨리 단호하게 주먹을 꼭 쥔다.
인생이란 이처럼 손을 펴거나 주먹을 쥐는 순간의 연속이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부드럽게 활짝 펴는 것과 같이 마음을 열어야 할 때도 있고, 주먹을 쥐는 것과 같이 단호하고 단단하게 마음을 동여매야 할 때도 있다.
마음. 부드럽게 열고 단단하게 닫아라.
<마음을 다스리는 기술> 이지드로 페르낭데
여전히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지만 낮에는 제법 따듯한 날들이 늘어가고 있다. 어느새 밤색 흙 속에서 연둣빛 새싹이 쏙쏙 올라와 온몸으로 봄이 온다고 알리고 있다. 봄이 오고 있다는 소식만큼 반가운 만남도 있었다. 동구, 라미가 자리 잡은 곳에 동락이가 찾아왔다. 지금까지 동구와 라미, 동락과 라미가 각각 같이 있는 모습만 보았던 나는 셋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마치 세계관이 붕괴되는 느낌이었다. 국내 연예인과 할리우드 스타가 같이 있는 모습을 예상치 못하게 목격한 기분이랄까. 고양이 세 마리 정도야 넉넉히 품을 수 있는 노란 철판이 드디어 풍성해진 느낌이었다.
동락이가 라미에게 다가가자 라미는 특유의 따듯한 눈빛으로 동락에게 다가가 코인사를 한다. 핑크빛으로 물든 촉촉한 코를 부비며 다정하게 서로의 체취를 매만지는 그들의 모습이 주변 공기까지 따스하고 말랑하게 만든다. 반면 동락이와 동구는 대면대면 하며 가까워질 듯 말 듯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는 듯했다. 동구가 어딘가 뚱한 동락이 곁을 맴도는 사이로 어색한 기류가 함께 맴돌았다. 그래도 아직 조그맣고 애교 많은 동구가 동락이에게 먼저 다가간다. 괜히 슬며시 얼굴도 들이밀고, 앞발로 조심스럽게 동락이를 건드려본다. 하지만 동락이는 그런 동구가 익숙지 않은 듯 차가운 얼굴로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경고를 준다. 동구는 몇 번 더 시도해 보다가 괜히 한 대 얻어맞고는 머쓱한 얼굴로 동락이와 떨어져 멀리 자리를 잡고 동그랗게 몸을 말고 앉았다.
이맘때 날씨는 그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어 따듯해진 공기에 단단히 여몄던 외투를 풀어헤쳤다가도 금세 쌀쌀하게 파고드는 서늘한 바람에 다시 옷깃을 단디 여며야 했다. 그러다가도 낮에는 갑자기 완연한 봄이 이미 당도한 듯 햇살 아래에서는 뜨뜻한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외투를 벗어 들어야 하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우리의 마음도 이를 닮아 맞닿아있는 주변 온도에 따라 열렸다 닫혔다 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마음이라는 건 우리 몸과 따로 존재하는 변온동물이라도 되는 듯 외계의 온도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다. 항상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과 달리 어찌할 수 없이 오르락내리락한다.
나의 마음도 그러하다. 누군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당신이 가진 온기를 전해주면 나의 마음은 어느새 스르르 긴장을 풀고 노곤하게 문을 열곤 했다. 그러다 갑자기 매서운 냉기가 불어오면 크게 놀라 문을 굳세게 걸어 잠갔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작은 바람에도 움찔거리며 창문을 여는 것도 두려워져, 내가 가진 창은 전부 단단히 잠겼다. 커튼 사이로 동태를 살피며 더 이상 상처 나지 않길, 감기에 걸려 혼자 앓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한 번 문을 열면 온 모양 그대로 내보내기 어려운 것이 바람이었고, 비라도 들이치면 축축하게 젖고 고인 것들을 보송하게 말리는 데만 한 세월, 말린다 한들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가기는 어려웠다.
정온동물로써 나는 일정한 온도와 일정한 마음을 유지하고 싶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나의 마음이, 열면 닫아야 하고 닫으면 열고 싶어지는 변덕스러운 마음이 고통스럽고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모든 문을 닫고 더 이상 열지 않음으로써 외로워도 쉬워 보이는 길을 선택하곤 했다. 자꾸만 나의 어두운 방 속에서 커져가는 외로움의 무게가 부드럽고 말랑한 나의 마음이 찢기고 터져 피 흘리는 것보다 가치 있으리라 나를 속인다. 이젠 암적응이 되어 흐릿하게 형체가 보이는 나의 새카만 방 안에서 나의 마음은 단단해지지 않고 더 연하고 유약해져 나의 움직임만으로도 스스로 쓸리고 짓이겨 울컥울컥 피를 쏟았다. 방 안에 온통 까만 피딱지가 앉았다.
멀리 떨어져 앉아있던 동구는 마음이 상한 듯 혼자 동그랗게 웅크리고 있다가 금세 꿈질거리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시 동락에게 다가간다. 한 대 맞기 전보다는 조심스러운 모양이지만, 날카로운 발톱을 그 보들하고 동그란 솜망치 사이에 꼭꼭 숨기고 톡톡 동락을 두드린다. 동락의 마음을 두드린다. 처음에는 이빨을 드러내며 하악질을 하던 동락이도 그 작지만 꾸준한 몸짓에 차츰 마음을 여는지 귀찮지만 봐주는 눈치다.
고양이들은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다가온다. 고양이를 만나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조용히 바라본다. 그렇게 묵묵히 기다리면 가만가만히 그러나 결연히 다가온다.
혼자가 된 작고 어린 동구에게 부드럽게 마음을 열었던, 동락이 언제 다시 돌아와도 부드러운 마음으로 받아주는 라미와 쉽게 곁을 내어주지 않는 동락. 그들이 동구에게 작은 코와 손을 내미는 부드러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단단함이 모여 만든 친절함을 보여주고 있으리라 믿어본다. 그들을 둘러싼 세상의 사랑과 관심이 라미와 동락이에게 부드럽고 단단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했듯이 이들의 마음이 모여 동구의 까만 외로움을 핑크빛 코처럼 부드럽고 단단한 마음으로 만들고 있다.
부드럽지만 단단한 친절을 보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해본다. 친절하여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되뇌어본다. 내가 상처 입지 않으면서 당신에게도 상처 주지 않을 수 있는 친절함. 단단한 그 친절이 나를 부드럽게, 마주하는 당신을 부드럽게 해 주리라 믿는다. 그렇게 우리가 모두 각자의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음을 알고,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단단한 친절함을 보여준다면 까만 방 안에 혼자 남겨진 외로움을 풀어줄 수 있지 않을까. 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고, 햇빛을 받고 단단한 딱지가 앉을 수 있게, 그렇게 새살이 돋아날 수 있지 않을까.
땅을 내려다보니 손톱만 하던 새싹이 어느새 손가락만큼 돋아났다. 그 작은 씨앗이 딱딱한 껍질을 터뜨리고, 똘똘 웅크리고 있던 싹이 몸을 피고 위로 옆으로 기지개를 켠다. 쌀쌀맞은 새벽의 추위와 서늘한 저녁의 바람을 견딘다. 포근한 봄바람을 맞으며, 온몸으로 따사로운 봄햇살을 쬐며 그렇게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