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잘못된 건 없어요

이지니 에세이 <아무도 널 탓하지 않아>

by 이지니

내 나이 서른하고도 중반이 된 지금, 침대에 가만히 누워 아무런 무늬 하나 없는 천장을 봐요. 평소에도 생각이 많은 내가 아예 대놓고 생각의 시간을 가지니 머릿속이 난리예요. 하나하나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구나, 싶어요.


"나는 언니가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줄 몰랐어."

"너는 또래에 비해 별일을 다 겪은 것 같아."

"사람은 겉만 보고는 모른다더니."

"내가 언니랑 친하지 않았다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야."


친한 지인들이 내게 한 말이에요. 나도 내가 살면서 이렇게 많은 일을 겪었는지 몰랐어요. 지금까지 서른 가지가 훨씬 넘는 일을 경험했지만, 그것이 내 인생을 좌우할 줄은…


하나하나 보면 썩 영양가 있지는 않기에 별스럽지 않게 여겼어요. 하지만 당시에는 잘 모르죠. 아니, 모르는 게 당연해요. 우리는 신이 아닌 이상 내일을 예측하기 어려우니까요. 인생은 내가 원하는 대로, 생각한 대로 흐르지 않기 때문이죠. 시험 문제에는 정답이 있지만 우리가 사는 인생은 힌트조차 빗겨가기 일쑤예요. 짧으면 며칠, 길면 수십 년 후, 더 가서는 수백 년 후에나 알게 되는 것들이 무수하니까.


내가 했던 일 중에 대부분은 글이나 중국어와 연관됐어요. 그중 2015년 초에 영상 번역을 배웠는데 처음에는 정말이지 멋모르고 했어요. 평소에 중화권 드라마를 보며 혼자서 번역하는 게 재미있어 업(業)으로 삼아도 좋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며, 실제 번역 작업을 하면서 깨달았어요. 세상에는 만만한 일이 없다는 것을… 다행히 엉덩이가 무거워 한 번 의자에 앉으면 웬만해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 터라 작업 시간이 오래 걸려도 꿋꿋이 할 수 있었어요.


번역 자체보다 나를 더 힘들게 한 녀석은 띄어쓰기와 맞춤법이에요. 우리말이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지 새삼 깨달았어요. 번역 실력은 당연하고, 한국어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오래 버티기 힘들었죠. 급기야 하루에 두 장씩 필사(베껴 쓰기)하기로 했어요. 모든 책이 완벽하진 않지만, 필사만큼 좋은 교재는 없거든요. '정말 이렇게까지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된 작업이었어요.


<너희들, 몇 시쯤 도착할 거니? 도착하면 내게 말해줘!>

<울지 마, 네가 울면 나도 마음이 아프단 말이야.>

<나는 네가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


그 일을 놓은 지 1년이 넘은 지금도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민감해요. 심지어 친구들과 휴대폰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에도 예외는 아니죠. 아무리 고치려 해도 잘 안 돼요. 초반에는 "하하, 무슨 메시지를 그렇게 보내니?", "야, 책 읽는 것 같잖아." 등의 말로 놀렸지만, 지금은 다들 그러려니 하는 눈치예요. 직업병에 걸리면서까지 열심히 하려했던 영상 번역에 손을 뗐어요. 그 후로 감사하게도 책을 집필하는 기회를 얻어 세 권의 전자책과 한 권의 종이책을 출간했어요. 당시 편집자가 내게 한 말이 기억나네요.


"지니 작가님, 원고 잘 읽었어요. 교정을 하려는데 생각보다 글에 군더더기가 없고,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도 잘 되어 있어서 놀랐어요. 편히 일하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영상 번역 때문에 넘어야 했던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이렇게 이어질 줄은 몰랐어요. 어릴 때부터 귀동냥처럼 들었던 "버려지는 경험은 없는 거야."라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죠.


2010년 여름, 다니던 무역 회사를 그만두고 두 번째 중국행에 몸을 실었어요. 중국은 2005년 9월에 약 1년간 다녀온 적이 있었기에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어요. 그때는 어학을 위해 몸을 실었다면, 이번에는 일 때문이었어요. 생활 중국어가 아닌, 비즈니스 중국어를 구사하고 싶었거든요. 하고픈 일은 기필코 해야 하는 내 성격을 아신 부모님도 응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어요. 그래요, 나는 문제 되는 게 없었어요. 하지만 벽은 의외인 곳에서 나타났어요. 나와 두 살 터울인 언니가 함께 가겠다고 하는 거예요. 중국어를 배우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요. 나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홀로 떠났으니까요.


"서른이나 됐는데 무슨 어학연수야?"

"괜히 동생이 간다고 하니까 너까지 가고 싶은 거야?"

"직장에 잘 다니다가 시집이나 가."


엄마 입장에서는 전혀 이상한 발언은 아니지 싶어요. 여하튼 엄마의 반대에도 언니는 나와 함께 상하이로 갔어요. 그곳에서 나는 돈을 벌고, 언니는 중국어를 배웠죠. 1년은 마치 한 달처럼 빠르게 지났어요. 언니는 귀국 후에도 감을 잃지 않기 위해 학원을 등록해 배움을 이어갔어요.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는 1년을 허비했다고 생각하셨는지 탐탁치 않는 눈치였고요.


어릴 때부터 옷을 좋아한 언니는 매일 옷과 함께 보낼 수 있는 동대문 의류 시장에 들어갔어요. 몸은 고되지만 행복해 하는 언니를 보니 나 또한 기뻤어요. 한류 열풍이 극에 달할 때 언니가 일하는 곳에도 중국인 손님들이 파도처럼 밀려왔어요. 그 말은 즉,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때가 온 거죠. 다른 매장에 중국인 손님이 오면 언니가 가서 통역을 했어요. 여기저기서 언니를 찾는 사람이 늘어났고, 동종 업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몸값(?)으로 러브콜을 받았어요.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언니는 자신과 비전이 같은 남자를 만나 더 즐겁게, 열심히 살고 있어요. 심지어 요즘에는 나보다 중국을 더 자주 가요. 지난달에는 남쪽 심천(深圳)을 가더니, 이번 달에는 북쪽 대련(大连)을 다녀왔어요. 중국 어디를 가도 그 나라 언어를 할 줄 아니, 즐겁고 행복하대요. 만약 2010년 여름, 엄마의 반대로 언니가 중국행을 포기했다면? 상하이로 떠나기 전, 언니는 오늘을 예감했을까요? 몇 주 전 형부와 잦은 출장을 다니는 언니를 보며 엄마가 한 마디 했어요.


"그땐 시간 낭비인 줄로만 알았는데, 역시 버려지는 경험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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