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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니 Jul 12. 2020

내 인생 최대의 ‘관계’ 실패

500만 원 다단계의 최후




“여보세요? 일주일 동안 스키장 아르바이트?
숙식 제공까지? 와우! 무조건이지!”    
 



중학교 동창 P 양이 마침 좋은 자리가 있다며 나를 찾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겨울방학 때 동네 음식점에서 일하려 했는데, 꿀 같은 스키장 아르바이트 소식에 찬밥신세가 됐다. 대망의 날, 소풍을 하루 앞둔 어린아이처럼 잠도 못 이룬 채 약속 장소인 석촌역으로 향했다. 코털까지 얼어버릴 만큼 추웠지만, 일주일간 일하며 먹고 잘 생각하니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이 부럽지 않았다. 친구가 먼저 와 있었다. 그런데, 이 싸한 기분은 뭐지?     




“저기, 있잖아. 사실은….
내가 시작한 일이 있는데, 너도 알면 좋을 것 같아서.”



스키장 아르바이트가 아니라는 사실에 화가 났지만, 5년의 우정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그녀의 사업장을 따라 들어갔다. 맨 앞자리로 인도된 나는 분수처럼 쏟아내는 침을 맞으며 강의를 들었다. 칠판에는 생물 교과서에서 보던 피라미드가 그려졌다. 말로만 듣던 다단계였다.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려면 눈에 뵈는 게 없다더니, 다단계임을 알면서도 그들이 말하는 그럴싸한 수익구조에 혼까지 빠졌다. 강의 마지막 날은 이 사업에 함께 할지를 결정한다.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진 않았지만 늘 아끼고 모으며 절약하는 엄마를 봐왔기 때문인지, 풍족하진 않아도 넉넉하게는 살고 싶었다. 그리하여, 강남역 부근 S 저축은행에서 겁도 없이 대출 신청서에 서명했다. 자본금 500만 원을 위해서다.






그렇게 경기도 성남시에 있는 옥탑방에서 합숙을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보일러가 작동하지 않아 야간 취침을 방불케 했지만 견뎌야 했다. 얼른 돈을 벌어 성공해야 했으니까. 새벽 5시에 일어나 6시까지 출근하고, 어떻게 하면 다음 손님을 데려올지 논의했다. 영화 <기생충>의 명대사처럼 이들도 계획이 있다. 그냥 하는 게 아니다. 드라마 작가 김수현도 울고 갈 대본 준비는 기본이다.

  

타깃은 나보다 3살이 많은 지인 L 언니. 나를 예뻐하고 아끼던 언니는 유난히 회사에 불만이 많았다. 바로 그 점을 노려(?) 시나리오를 짰다.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이 언니가 재취업을 원하는 ‘광고 회사’라 속이고, 사장님께 언니를 추천했다고 거짓말했다. 평소 쌓은 신뢰가 여기서 빛을 발하는 순간이 온 건지, 언니는 내 말만 믿고 퇴사했다.



 




만나기로 한 날, 사무실 근처에 있는 카페에 먼저 가서 오렌지 주스 두 잔을 주문했다.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언니는 정각이 되자 문을 열고 나타났다. 스키장 아르바이트인 줄 알고 왔던 나처럼 신이 난 듯해 보였다.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미안했지만, 함께 성공하면 나를 이해해주겠지, 싶어 표정 관리에 더욱 신경 썼다.


     


“언니, 사실은 내가 일하는 곳이
광고 회사가 아니야.”



떨림이 입 밖으로 새 나갈까 봐 조심하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끔찍한 진실과 마주한 언니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아, 올 것이 왔구나.’ 두려웠다.




“언니, 미안해. 하지만 언니를 속이려
나쁜 마음으로 그런 건 아니야. 잘 되고 싶어서….”


    

어쩜 그 순간까지도 돈독이 오른 것처럼 염장을 지르는 말만 골라냈다. 언니는 말 같지 않은 말을 들으면서도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나에 대한 실망감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듯해 보였다. 아, 차라리 앞에 놓인 주스를 내 얼굴에 붓던지, 욕이라도 시원하게 뱉으면 좋으련만... 언니는 애써 이성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밀어냈다.



  

“다 이야기했니? 그럼, 난 이만 가볼게.
그리고 지니야, 얼른 거기서 나와.”



그 자리에서 언니가 건넨 처음이자 마지막 말이었다. 언니는 내게 끝까지 어른이었다.  




   




벌써 17년이 지났다. 지금껏 언니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상대에게 죽을 죄를 지은 듯한 미안함이 있다면 두려움 때문에 연락을 못 한다. 이 죄스러움이 공중 위에 흩어지는 연기처럼 사라질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진다. 손가락 깊숙이 박혀 빠지지 않는 가시처럼 미세한 고통이다. 500만 원 다단계의 최후는 생각보다 아프다. 시간과 돈을 잃은 것보다, 신뢰로 쌓인 관계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이 잔인하다.


불법 다단계,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됨을 누구보다 잘 안다. 당시엔 속일 수밖에 없었지만, 상대를 이용할 생각은 없었다. 함께 잘되고 싶었다. 같잖은 말로 잘못을 포장하려는 건 아니다. 내 인생에 그저 그런 사람, 속여도 되는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물론, 입이 열 개라도 나는 할 말이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언니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으니까. 이 글로나마 언니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싶다.     







“언니에게 나는,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겠죠. 철없던 내 과거를 이해해달라고는 안 할게요. 다만, 17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순간도 잊지 못합니다. 글의 주제가 ‘실패’와 ‘두려움’이란 말에 제일 먼저 언니가 떠올랐어요. 어쩌면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지면을 빌려 마음을 다해 용서를 구해요. 내가 정말 잘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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