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여지없이 왼손에 아이디카드가 들려 있었다. 이번에도 오른손보다 왼손이 빨랐다. 교통카드를 꼭 쥐고 있던 오른손은 그제야 허공을 허우적거리며 개찰구 문을 열어준다. 종종걸음을 내닫는 사람들로 퇴근 무렵 흔한 풍경이 펼쳐지는 일산역 1번 출구. 나는 직장인에서 엄마로 변신하는 그 길목에서 회사 아이디카드를 들이밀고 말았다.
'어머, 나 왜 이러지, 치매가 왔나! 미쳤나 봐'
사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처음 그 상황을 마주했을 때는 몰려드는 창피함에 개찰구를 빠져나오기 급급했다. 이 사건에 대해 조금씩 생각해 보게 된 건 같은 일이 네다섯 번 반복이 되면서부터였다. 그날도 개찰구로 올라가는 계단을 딛으며 이번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교통카드를 꼭 쥐고 있었지만 "삐삐~"하는 우렁찬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말았다.
나의 뇌는 어쩌다 아이디카드와 한 몸이 되어버린 것일까.
월급의 노예
안정적인 수입에 만족하는 사람들
도전을 두려워하는 족속
가늘고 길게 버티려는 자
'회사에 오래 다니는 직장인'을 생각하면 흔히들 떠올리게 되는 표현들이다. 아이디카드 사건이 있은 후로 '나의 뇌가 왜 이렇게 고착화되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다가 '월급의 노예'와 연관 짓게 되었다. 사실 나의 뇌뿐만 아니라 나의 심장, 나의 온몸이 회사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루의 시작부터 꼬이는 날이 있다. 은행을 가야 해서 FT 출근하게 된 화요일. 그날이 딱그런 날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오전 6시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은행이 9시에 여니까 8시 반까지 회사일 좀 하다가 나가야겠다.'
회사 노트북을 여는 순간
'아.. 맞다. VPN 기간이 어제 만료되었는데, 연장을 안 해 버렸네. 일하긴 글러 먹었군'
출근 기상 시간에 맞춰 일어나 씻고 앉아는 있지만 이 일도 저 일도 못하고 있는 초조한 나를 발견한다. 최근의 나는 늘 이런 식이다.찰나의 여유 시간이 주어질 때 그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은 마음만 앞서 아무 일도 못하게 되곤 했다. 읽고 싶었던 책을 몇 장 넘기다 말고 뜬금없이 노트북을 켜서 쓰고 싶은 글의 목차를 적어 내리기도 한다. 그러다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책장 구석 먼지 쌓인 다이어리를 꺼내 휑하게 빈 주간 계획을채우기도 한다. 엄마가 곁에서 나를 지켜봤다면 '너 지금 뭐 하는 거니?' 한소리 하셨을 텐데.
시작부터 꼬인 그날,오전 2시간을 날리고 은행 9시 오픈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8시 45분 은행 앞에 도착했는데, 코로나로 영업시간 변경이란다. 9시 30분까지 내 앞에는 또 40분이라는 찰나의 시간이 놓였졌다. 2천 원짜리 아이스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2 블록을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평일 대낮의 거리를 다닐 때 나의 심장은 늘 쿵쾅거린다. 그러다 핸드폰 진동이 울리면 소스라치게 놀란다. 회사에서 나를 찾는 전화일까 봐. '공황장애' 초기 증상이 이렇지 않을까짐작해 본다. 나에게 평일 대낮의 햇살과 주말 대낮의 햇살은 너무나 다르다. 평일 시간의 70%를 회사에 메어 있는 나의 사지는 평일의 햇살에 알레르기 반응이 생겨 주말의 햇살과 구분하는 능력을 갖게 돼버렸다.
평일 낮의 햇살을 온몸으로 흡수하고 싶다.
찰나의 해방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 뿐 나는 영원한 해방을 원한다. 만약 영원히 해방된다면, 평일 낮의 시간이 온전히 나에게 주어지게 된다면 내 삶은 변화가 생길까? 더 이상 개찰구에 아이디카드를 대지 않을 방법은 찾은 것 같다. 아이디카드를 잘 포장해서 깊숙한 곳에 숨겨 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