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돌멩이는 돌멩이다. 그것은 또한 짐승이기도 하며, 그것은 또한 신이기도 하며, 그것은 또한 부처이기도 하다. 내가 그것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그것이 장차 언젠가는 이런 것 또는 저런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고 항상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p.208,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이 문장을 읽던 중 뇌리에 스친 장면이 있는데 작년에 가장 인상 깊게 본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에 돌멩이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이 영화는 B급 코미디 영화로 위장해 철학, 인문, 종교 등 여러 가지 레퍼런스를 인용하며 많은 사람을 울린 ‘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영화에서 주인공 에블린은 메타버스를 통해 내가 했던 수많은 선택들을 했더라면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또 다른 나를 만난다. 그럼에도 결국 에블린이 선택하는 건 가족들과 온갖 갈등을 겪으며 지난한 일상을 살아가는 현재의 나다.
에블린은 딸 조이와 돌멩이가 된 시공간에서 만난다. ‘하찮고 어리석은 존재, 그게 바로 인간이야’라는 고백하며 하나의 우주에 모든 것이 존재하지만, 그조차 무수한 우주 중 하나임을 깨닫는다. 영화를 연출한 감독 듀오가 분명 <싯다르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책과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가 일치한다.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 살아가자는 것이다.
작고 어리석은 존재인 우리는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고 앞으로 많은 선택을 하게 될 미래를 걱정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임에도 우리는 늘 지금이 가장 불안하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을 살지 못한다. 돌멩이는 이 순간 돌멩이로 존재한다. 그것이 모든 것이고 그저 돌멩이로 존재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우리이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게 존재하면 된다.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욕망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허무감을 안겨준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이 넘쳐나는 풍요의 시대를 살면서도 계속해서 욕망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공허함을 채우려고 한다. 결국 이 과정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문제로 귀결되는데 영화에서는 ‘다정함’, 책에서는 ‘사랑’이라는 답을 제시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가 있는 것, 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오직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야.”
-p.212,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은 상품으로 매체로 너무 쉽게 소비되기에 진짜 사랑은 귀해진 세상이 되었다. 모든 사랑에는 돈이 앞선다. 사랑해서 하는 결혼도 돈 없이는 성사되기 힘들고, 예물로 예단으로 사랑을 전시한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돈이 없으면 자식에게 흙수저를 물린 부모가 되고, 무엇을 얼마나 해주느냐에 따라 사랑의 크기가 결정된다. 사랑은 서로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에도 담길 수 있고, 영화에서처럼 집에서 만든 쿠키를 이웃과 나눠 먹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랑에 돈이 앞서는 세상에서는 모든 행위에 사심이 가득하다. 그래서 일상에서 사랑을 전하기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나는 올해부터 무엇을 하겠다는 목표나 계획을 세우지 않고 마음에 품고 살아갈 단어들을 몇 개 골랐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어가 바로 ‘사랑'이다. 무엇보다 먼저 나를사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지금 생각하면 이불킥할 정도로 과거에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할지라도 그때의 나를 지금의 내가 보듬어 주기로 했다. 지금을 그렇게 사는 오늘의 나는 어제와는 다른 나일 테니까.
본 콘텐츠는 창고살롱과 공동 기획, 편집하여 유료서비스 <레퍼런서의 글> 구독 콘텐츠 서비스로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