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희망나눔은 회원 활동과 참여로 이루어지는 단체다. 서로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그 면면을 서로 볼 수 없는게 아쉬웠다. 그래서 2020년 코로나 시기에 회원인터뷰를 시작해 2년 가까이 블로그에 연재하기도 했다. 회원들이 어떤 활동들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해, 그 사이 중단되었던 인터뷰를 다시 시작한다. 다양한 인터뷰어들이 각각 다른 색깔과 형식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그 시작은 반찬나눔 활동을 하고 있는 랄라가 반찬나눔을 활동을 처음 시작한 그래그래를 만난 이야기다.
랄라가 맡은 인터뷰 코너의 이름은 ‘돌(아)보는 식탁’이다. 마포희망나눔이 무얼 하는 곳일까를 생각해 보다가 ‘희망나눔은 서로를 돌보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한 바쁘고 바쁜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 없는 것 같아, 회원들이 인터뷰를 하는 시간만이라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았다.
돌(아)보는 식탁 1. 그래그래
랄라 |인터뷰를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고민을 하다가 <엄살원>이란 책을 떠올리게 됐어요. ‘엄살부리다’할 때 그 엄살인데, 뭘 고쳐주는 건 아니고, 채식 요리를 해서 같이 먹으면서 인터뷰를 하는 거예요. 저도 처음엔 차 한 잔 마시면서 하는 인터뷰를 생각하다가 그것 보다는 같이 밥 먹으면서 하는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비타가 워낙 요리를 잘 하시기도 하고요. 그래그래가 멀리 살고 계셔서 괜찮을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래그래 말고는 제가 아는 분들이 별로 없어요. 그렇기도 하고 오래 활동도 하셨고 해서 제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오늘 모시게 됐어요.
랄라 |근데 그래그래는 왜 그래그래요?
그래그래|마포에 오기 전에는 해바라기였어요. 분당에서 공동육아를 했었거든요. 그리고 나서 성미산 마을에 왔는데 생협에 ‘해기’가 있잖아요. 마을에 큰 비중 있는 해바라기, 해기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막 고민을 하다 그때는 둘째가 성미산 어린이집을 다녔는데 비행기라고 별명을 새로 지었죠. 그리고나서 아이들이 다 커서 학교 다니게 되면서 보니까 어린이집에서 지은 이름 아닌 다른 별명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혼자서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그래’라고 지었어요. 긍정하는 언어라서 ‘그래’였는데 생각해보니까 맥락에 따라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겠더라고요. 너무 가볍게 아니면 또 부정적으로도 쓰니까요. 그래서 이 두 개를 붙여 ‘그래그래’라고 지 었죠. 그런데 우리 애들이 ‘엄마 누가 불러줘?’ 그러더라고요. 이름은 지었는데 불러줄 사람이 없는거죠.
랄라|지금은 그렇게 불리시는 곳이 여기 말고 또 있어요?
그래그래|없죠. 그냥 이름으로 불리죠.
비타|희망나눔에서 반찬나눔 활동을 하신지가 얼마나 되셨어요?
그래그래|2005년서부터 했죠. 거의 처음 시작 때부터 한 거죠.
랄라|그래그래 집에서 처음 시작했다고요? (많이 놀람)
비타|그때는 반찬을 몇 인분 정도 했었어요?
그래그래|글쎄요. 뭐 4, 5인분 정도 하지 않았을까요?
비타|그때는 몇 분 안 계셔서 서로 다 뵙고 그랬겠어요.
그래그래|저는 직접 뵙진 않았어요. 저희 남편이 마을에 와가지고는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서 일을 하고 싶다, 활동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마포희망나눔 전신이였던 곳에서 참여했었고 남편이 어르신들한테 반찬을 하기로 결정을 하고 우리 집에서 해야 될 것 같다고 저한테 얘기를 했죠.
비타|전신이였던 곳 이름이 뭐예요?
그래그래| 마포연대요. 희망나눔이 마포연대의 분과였거든요. 그러니까 거기 복지교육분과, 교육분과에서 지역 단체들 복지관이나 자활센터랑 같이 연계해서 이제 지역 조사도 같이 하고, 그 지역 조사를 한 결과를 바탕으로 해서 어르신들한테 먹거리가 되게 필요하다, 그래서 만들어야 되는데 남편이 우리 집에서 해볼까 그랬나봐요.
랄라| 근데 반찬은 그럼 남편분이 직접 만드셨어요?
그래그래| 아니요. 제가 만들었죠. 남편은 배달을 했어요. 그때는 수요일날 했었는데, 녹색병원 간호사 한 분이 같이 반찬을 만들어 주셨어요.
비타| 그러면 두 분이 시작하신 셈이네요. 결연 어르신들은 몇 분이나 계셨어요?
그래그래|글쎄요. 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그렇게 많지는 않았어요. 한 달에 두 번 했었나.
비타|남편분 성함이랑 별명도 알려주세요.
그래그래| 오준성, 해야해야예요.
랄라|그래그래, 해야해야, 뭔가 비슷하네요.
비타| 초기에 운영위원 활동도 하셨던거죠?
그래그래|네, 그런 것도 했었던 것 같아요.
비타| 그래그래와 해야해야가 희망나눔 시작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셨어요.
그래그래| 남편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발을 들였을까 싶어요. 왜냐하면 이렇게 오래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요. 시작하는 게 쉽지가 않은데, 어쨌든 간에 시작은 남편이 했죠.
랄라| 근데 그렇게 얘기하셨을 때 뭔가 거부감이나 그런 건 없으셨어요? 그냥 해야지하는 마음이 드셨어요?
그래그래| 꾸준히 할 수 있을까가 걱정이었지, 나 때문에 차질이 생기면 어떡할까 그런 걱정은 있었어도 반찬을 만드는 건 걱정이 없었어요.
비타|그때 일하고 계셨었죠?
그래그래| 맞아요. 특수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었죠.
랄라|저는 반찬나눔 활동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처음에 되게 가볍게 생각하고 시작 했었거든요. 다른 어린이집에서도 다 하는 일이고… 그리고 사실 반찬이라는 게 거창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을 했어요. 근데 이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까, 저도 내가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고, 내가 이런 마음으로 하는 게 맞나 이런 마음도 들기도 하거든요. 그래그래는 어떤 마음이신지 궁금해요.
그래그래| 저도 이런 마음으로 해도 되나 하는 마음으로 오래 고민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누군가가 예전에 그랬는데, 희망나눔에서 반찬을 하는게 ‘내가 특별해지는 느낌’이 든다고요. 저도 그랬어요. 반찬을 하는 내가 되게 특별해지는 느낌이었고, 내가 그냥 그만두면 정말 특별해지는 느낌이 없어지는 그런 마음도 있었고, 권태기를 그렇게 그냥 버텼던 것 같아요.
무엇을 먹고 사는가
랄라|그래그래는 어떤 음식을 주로 드세요?
그래그래|요즘은 남편한테 안 해주는 날이 많긴 하지만, 아침엔 그냥 일품 요리, 일품 덮밥으로 주로 먹어요. 저 혼자 집에서 먹을 때는 간단하게 먹으려고 노력해요.야채 많이 먹으려고 하고요. 남편이 저녁을 안 먹으니까 요리할 일이 별로 없어요.
랄라|저도 채소를 많이 먹으려고 노력은 하는데, 남편이랑 아이랑 같이 사니까 쉽지 않아요. 남편이 고기를 좋아하기도 하고, 그리고 일단 되게 요리하기가 쉽잖아요. 그래서 고기를 많이 먹게 되는 거예요.
그래그래|고기는 많이 안 먹는데 탄수화물을 많이 먹어요.
랄라|근데 고기를 많이 안 먹으면 사실 좀 선택지가 많이 줄어들어서 탄수화물을 많이 먹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그래|맞아요. 노력하지 않으면 야채를 먹기가 어렵더라고요.
비타|맞아요. 그래그래는 따님이 청년 농부라 채소농사를 짓고 있지요?
랄라|그래그래도 하시지 않아요? 농사.
그래그래|저는 쌀, 논 25평
랄라|쌀을 키우신다고요? 쌀농사를?
그래그래| 25평 하거든요. 10kg 정도 나오네요.
비타|너무 조금이다.
그래그래|25평이니까
랄라|그럼 그게 1년에 10kg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그래|25평에 25kg가 나오는 게 최대 수확이죠. 홍성에 계신 금창영 선생님이라고 그분이 하시는 900평 논을 나눠서 하는 거예요. 농사법도 알려주시고. 제가 올해 네 번째인데 첫 번째는 주먹만큼 나왔어요. 그러니까 뭐가 뭔지, 뭐가 풀인지 피인지 모르고 그냥 하다 보니까 (주먹을 쥐어보이며) 이만큼 나왔어. 두 번째는 좀더 많이 수확해서 집에서 가정용 도정기로 도정도 하고요.
비타|집에 도정기도 있어요?
그래그래|다른 사람한테 빌렸어요.
비타|쌀농사는 남편 분이랑 함께 하시는 거예요?
그래그래|아니요. 제가 농사 짓는다고 했을 때 남편이랑 저희 큰애가 “나만 안 시키면 해도 돼” 그랬어요. 그런데도 많이 도와줘요.
랄라|근데 벼를 직접 키워가지고 아까워서 그걸로 밥을 못 해먹을 것 같아요.
그래그래|첫 번째는 뭐 도정할 것도 없이 그냥 없어지고 두 번째 거는 그냥 페트병 하나씩 이렇게 도정을 해서 먹었어요. 근데 보관을 잘못해서 한여름에 곰팡이가 났지. 작년에 수확한 건 그래도 꽤 됐는데 아직도 도정을 못하고 선재 집에 있어요.
금창영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저온 냉장고에 넣어야 이 쌀맛이 보존이 된다고 해요. 그러니까 재미로 하지, 막 먹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비타|그래도 매년 수확량이 늘고 있네요.
그래그래|맞아요.
비타|저도 쌀농사를 지어서 처음 도정해온 날, 저기 저 가마솥에다 밥을 지었는데 그 맛은 잊을 수가 없어요. 다음에 오시면 밥 해드릴게요.
돌봄이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비타|과일이 요즘 되게 귀하잖아요. 근데 그래그래가 반찬나눔에 매번 과일을 채워주시니까 딱 좋아요.
그래그래|반찬을 만들면서 어르신들한테 뭐가 필요한지는 생각하게 됐던 것 같아요. 과일하고 김치. 그 정도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한동안은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김치만 만든 적도 있어요.
비타|그리고 그래그래가 만들어서 보내주시는 반찬 배달 가방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어요. 오래 해오신 경험을 바탕으로 반찬 배달에 딱맞는 가방을 손수 만들어 보내주시곤 해요. 바닥이 좀 있어야 하고 안에서 반찬통이 막 굴러다니지 않아야 되고 크기도 적당해야 하고… 한땀한땀 공들여 만드신 손길에 감동받았어요.
그래그래|재봉틀로 하는 거라서 시간은 좀 오래 걸리는 편이에요. 한 20개 정도 만들면 이제 만들기 싫어져요. 한 번 만들 때 한 10개 만들고, 이제 또 쉬었다가 만들고 해요. 지금도 천 많이 모아놨어요.
비타|이렇게 그래그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희망나눔 반찬나눔의 역사가 한눈에 보이네요.
그래그래|남편이 아니였으면, ‘우리 집에서 할게요’라고는 말 안 했을 것 같아요. 어쨌거나 그렇게 시작했는데 뭐 집에서 반찬 몇 가지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는 있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 ‘나도 반찬나눔 같이 하고 싶어’, ‘나도 반찬 한 가지 담당할게’ 해줬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저는 주어진 거 그냥 하는 스타일인데 누군가는 이렇게 변화를 만들어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나도 참여하고 싶은데 거기 같이 가서 하는 건 좀 힘들 것 같다면서 반찬 하나를 도맡겠다고 해주었어요. 그렇게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고 활동의 형태가 변했죠. 그런 것도 되게 큰 전환이 되었어요.
랄라|근데 저는 사실 그냥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거든요. 그냥 반찬 하나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 아니라고 생각했고요. 저는 어린이집에서 같이 시작했기 때문에, 제가 하는 것도 있었지만 사람들이랑 같이 모일 수 있는 그런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어요. 새로 들어오신 조합원도 그렇고, 모여서 좋은 일 한다고 얘기를 하면 별로 그에 대한 거부감이 없으니까 관심을 많이 가져 주셨어요.
그렇게 시작을 했는데, 저는 희망나눔을 잘 알지도 못했고 저는 마을에 살지도 않고 그래서 그냥 한 달에 한 번 내가 할 수 있는 반찬을 만드는, 그 정도로 생각을 했었죠. 그런데 저번에 비타가 얘기를 하다가 희망나눔이 우리가 서로서로 돌보는 곳이라는 얘기를 하셨어요. 돌봄이라는 것에 대해서 좀 무거운 담론이나 의제로 생각을 했었다가 최근에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돌봄은 그냥 일상적인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돌보는 일에 대해서 우리가 좀 얘기를 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이 자리의 이름을 ‘돌(아)보는 식탁’ 으로 정했어요.
그래그래가 이제 사회복지사 공부도 하신다고 하고, 어쨌든 이 반찬을 하는 것도 계속 돌봄을 하는 거고, 가족도 돌봄을 하시고, 반찬 안 해주신다고 하지만 어쨌든 남편분 밥도 해주시고, 돌봄이라는 것에 대해서 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좀 궁금했어요.
그래그래|제가 했던 행동들이 돌이켜보니 돌봄이었다는 거잖아요.
랄라|그게 이렇게 이름 붙여지지 않았던 거죠. 그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이었고요. 그런데 이제 우리가 언어를 붙여주면서 좀 다르게 생각하게 되는것 같아요. 우리가 돌봄의 가치를 돌아본다는 측면에서 반가운 일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굳이 그렇게 이렇게 해야 되는 그런 일인가 뭔가 그런 생각도 들고 좀 복잡한 마음이 들었거든요.
그래그래|저는 친정엄마의 영향이 그런 면에서 있는 것 같아요. 친정엄마가 사람들 집에 불러서 먹이는 걸 되게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누군가 집에 오는 게 사춘기 때는 별로 안 좋았지만, 그게 되게 당연한 일이었어요.
저희 친정엄마는 늘 당신이 하시는 음식을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걸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우리 엄마에 비해서 음식은 못하지만 힘들어하지 않았던 엄마를 봤고, 그래서 음식하는 게 힘들지 않았어요.
맛은 없어요. 내가 음식을 잘해서 한 게 아니라 그게 부담스럽지 않았으니까 한 거예요. 그게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냥 우리 엄마가 늘 뚝딱뚝딱 하는 걸 봤고, 뚝딱뚝딱 하면 이게 나온다라는 거를 배웠지만 뚝딱뚝딱 해서 나오지는 않았죠. 그래도 음식 만드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고, 이제 우리 아이들은 다 이제 둘 다 독립을 했으니 자녀 돌봄도 끝났고! 돌봄이 특별한게 아니라 그냥 내가 할 수 있는걸 하는 거죠.
랄라|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세요? (의미심장)
그래그래|제가 우리 큰애한테 음식하는 걸 못 가르쳤더라고요. 큰애와 둘째가 다른데 둘째는 자기가 음식을 해서 먹는 스타일이고, 첫째는 음식을 사 먹는 스타일이었어요. 그런데 사 먹다 보니까 소화가 너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제 음식을 가려 먹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한 시점에 저도 샐러드나 그런 것들을 멀지 않으니까 갖다 주고. 그게 돌봄이라면 돌봄일까요? 그런 관계는 유지하고 있죠. 남편이랑은 뭐 제가 밥을 해주는 것도 있지만 뭔가 돌봄받는 게 많다고 생각해요.
랄라|그래그래가 받으시는 게 많아요?
그래그래|평안한 주거와…
노년은 길다
비타|예전에 반찬을 직접 배달하시면 어르신들이 어떤 말씀들을 하셨어요?
그래그래|저희 남편이 되게 내성적이거든요. 그래서 가서 무슨 얘기하는지 물어보면 어르신들마다 레파토리가 있다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근데 정말 그런 것 같아, 내가 무슨 얘기를 해야 되는지 생각하지 않아도 어르신들이 그냥 말씀하셨어요.
비타|지금은 오아시스 봉사단 아이들이 반찬 배달을 하잖아요. 결연 어르신들 중에 몇 분은 꼭 뭔가 아이들에게 줄 걸 준비해 놓고 계세요. 옥수수를 삶아놓는다든지 과자를 한 박스 준비해 놓는다든지. 최근에는 옥수수나 감자를 삶아서, 아이들 손에 들려 보내세요. 아이들이 들고오는 반찬을 받으시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신가봐요.
그래그래|예전에 조현숙 어르신으로 기억해요. 근데 정말 어르신들 보면서 느끼는 건 그 노인이라는 것이 조심스러운 거예요. 그분들 스스로도. 조현숙 어르신은 위가 되게 안 좋으셔서 매운 걸 못 드셨어요. 서서 반찬통 설거지하는 것도 힘드니까 비닐에 담아줬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또 너무 위통이 심해서 응급실에 가고 싶은데 밤에 응급실 앰뷸런스를 못 부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왜냐고 여쭈니 밤에 병원차를 부르면 주인이 재계약 안 해줄까 봐, 그래서 나 여기서 못 살게 될까봐 그렇다고 하셨어요.
랄라|진짜 충격적이네요.
그래그래|그래서 나이 든다는 게 이런 거구나. 정말 아프다고 해서 얘기할 수 없구나. 그랬던 생각이 나요.
비타|요즘은 독거 중장년 분들과 반찬 결연이 늘고 있는 추세예요.
그래그래|맞아요. 그렇게 바뀌는 것 같아요. 70대 어르신이 반찬을 받기 시작하셔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이다 라고 생각을 했는데, 90이 되어서도 계속 나눔이 이어졌던 거잖아요. 노년이 참 길다라는 생각을 해요.
랄라|2005년에 시작하셨으면 그때랑 비교해서 그래그래도 나이가 드셨으니까 좀 마음이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어떠냐면 아직은 되게 거리가 있다고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가 노년이 돼서 이렇게 반찬을 손수 할 수 없는 그 상황이 바로 앞이라는 생각은 잘 안 들거든요.
그래그래|제가 30대에 70대 어르신을 뵈었을 때 되게 어르신으로 느껴졌었는데, 20년 지나고 보니 70대 어르신은 젊으시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희 부모님이 이제 여든이시니까. 20년 전 70세는 지금의 70세와 달랐던 것 같아요. 희망나눔 활동을 하면서 계속 내 노후를 생각하게 됐던 것 같아요. 가늠해 보는 것 같아요. 남편이 여름철에 반찬 배달을 하러 화장실도 없는 어떤 집에 갔는데, 어르신이 '덥지~' 하면서 선풍기를 켜주시더라는 거예요. 전기세가 아까워서 혼자 계실 땐 선풍기도 안 켜고 참으시다 손님이 오니 선풍기를 켜주더라는 거예요.
비타|랄라는 자신의 노후가 상상이 되나요?
랄라|사실 잘은 안 되는데, 저는 계속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늙고 죽는다는 게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계속 생각해 봐요. 그리고 저희 같이 책 읽었을 때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요양병원 같은 시설에 들어가고 완전한 타인, 요양보호사분들이 해 주시는 거를 받는 게 되게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근데 그런 인식으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아무리 직업으로 하는 일이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의지하는 것에 대해서 그런 마음으로는 살기가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내가 다시 돌아갈 곳
랄라|전 다정하다는 게 되게 큰 어떤 덕목 같은 것 같아요. 그게 되게 좋아 보여서 한때는 되게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평생 못 될 것 같아서… 그냥 좀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 좋을 것 같아요. 내가 되는 건 못 할 것 같고…
비타|근데 제 경험으로는, 나중에 지나고 보면 그런 자기가 돼 있기도 하더라고요.
랄라|저는 이제 초등학교를 보낸지 1학기 지났지만,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졸업했고, 대안교육을 했던 거잖아요. 그래서 공교육에 대해서 되게 걱정이 많았거든요. 근데 생각보다 괜찮은거예요. 물론 제가 봤을 때는 몰라서 그런 게 클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공동육아는 워낙 제가 볼 수 있는 게 많고 거의 다 알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좀 궁금했어요. 공교육이 아닌 대안 교육을 찾는 이유가 있는지 궁금해졌어요.
그래그래|큰 애가 2005년도에 초등학교 1학년 입학 했는데, 그 전에 대안학교가 많이 생겼고, 기숙학교가 아닌 초등입학이 가능한 대안학교가 성미산학교였어요. 저는 사람, 교사, 때문에 선택한 것 같아요.
저는 대안학교를 선택했고 늘 만족했어요. 그런데 저희 아이 친구들 중에 대부분이 일반 학교를 갔어요. 분당에서 공동육아를 했는데 선재랑 한 친구만 대안학교를 갔고 나머지는 다 공교육을 갔죠. 사립학교 간 친구도 있었어요. 걔네들도 다 잘 지냈어요. 지금 보니 뭐 다를 바 없죠. 뭐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그런데 저는 그 많은 과정들이 선재한테는 되게 행복한 시간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본인이 뭐가 특별한지도 모르고 뭐가 행복인지도 모른다 해도, 어른의 입장으로 부모 입장으로서 아마 매순간 행복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 아이들 친구들 보면 다들 잘 지냈어요. 그래서 그래, 공교육이 나쁘지 않다고도 생각하고요.
그런데 저는 제가 덜 힘들었다고 생각해요. 입시로부터 어떤 경쟁으로부터 멀어져서 저는 제가 편했다고 생각해요.
우리 아이 친구들끼리 선재한테 모범생이라고 했었는데, 그냥 예의가 바르고 수업에 열심히고 그거였어요. 모범생이라고 하면, 일단 공부를 잘하는게 기본인데, 선재랑 친구들이 생각하는 모범생의 기준이 너무 재미있고 되게 좋았어요.
랄라|근데 대전으로 가신 거는 남편분 때문에, 그럼 계속 그전에는 마을에서 어쨌든 계셨어요?
그래그래|그렇죠. 제가 2005년도에 여기 이사 와가지고 21년까지는 있었죠.
랄라|마을에 계시다가 연고가 없는 데로 가셨으니까 되게 사는 것도 많이 달라지시지 않았어요? 삶의 양식이나 이런 거? 저는 마을에 안 살아봐서 모르겠는데...
그래그래|우선은 많은 관계에서 많은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좋았어요. 좀 약간 나만의, 나한테만 집중할 수 있는…
랄라|그래그래 만큼은 아니겠지만 저도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5년을 다니고 졸업했거든요. 그러고 나서 저도 학교를 갔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그게 너무 좋았어요.
그래그래|제가 거주지를 옮긴 게 아니라 임시로 왔다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냥 여행하는 마음?
랄라|그럼 다시 오실 거예요?
그래그래|남편이 발령을 받거나 퇴직을 하거나 그러면 다시 오지 않을까요?
랄라|여기 마을로요?
그래그래|이 마을? 아니 서울로?(웃음) 하지만 마을과는 연결이 되지 싶어요. 저한테 이 마포 아닌 어떤 다른 곳은 대전과 다를 바 없어요.
비타|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래그래|맞아요. 나를 소비하거나 어떤 나를 소모하는 관계가 아닌 관계를 여기서는 맺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타|동네에 오면 꼭 연락을 하는 친구는 누구예요?
그래그래|거의 신비죠.
랄라|신비 대단한데! 근데 지금 잠깐 여행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니까 되게…
비타|달콤한데요!
랄라|그러게요. 저는 다시 돌아가 어디로 갈 수 있다고 생각되는 곳은 없거든요. 뭔가 뭔가 여기를 떠날 때 그렇게 생각하면 되게 든든하기도 하고, 뭔가 그럴 것 같아요.
이 인터뷰는 작년, 가는 여름을 붙잡고 샤인머스캣과 아이스크림으로 시작해 오늘의 요리 '구운야채 냉국수'를 먹으면서 했다. 그런데 벌써 시간이 흘러 냉국수가 그리워지는 계절이 다시 찾아왔다.
인터뷰를 하면서 희망나눔에서의 자원 활동부터 지리산 똥 이야기까지 많은 주제를 넘나 들었다.
그래그래에게 돌봄은 엄마가 주위 사람들에게 늘 해오셨던 것, 나도 당연한 것으로 알고 해왔던 것, 나도 많이 받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끔은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일이었다.
그래그래에게 그것은 일상이었고, 그래서 마을을 떠나 대전에 살면서도 그 기회를 찾아 문을 두드려 보았다고 했다.
그래그래는 대전에서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멀리있다고 느껴지지 않을만큼 늘 그자리가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주욱 그럴것만 같다. '그래그래'라고 더 자주 많이 불리면서.
[여름의 맛! 구운야채 냉국수]
1. 집에 있는 각종 야채 (집에 없을 확률이 높음...) 파프리카, 애호박, 가지, 토마토,버슷 등등을 적당히 굽는다.
2. 쯔유, 물, 식초, 설탕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육수를 만든다.
3. 육수에 구운 야채를 넣고 냉장고에 반나절 정도 보관한다.
4. 한살림 현미국수(물론 현미국수가 아니여도 된다. 식감이 잘 어울림)를 삶아 곁들인다.
5. 기호에 따라 레몬즙을 뿌려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