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인클루시브, 템플스테이(2)-해인사
난생처음 법륜사 템플 스테이를 다녀와서 '올 인클루시브'의 매력에 빠진 나는 템플 스테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나도 그랬지만 템플 스테이를 어디서 알아봐야 하는지 모르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 소개하자면 각 절들의 템플 스테이를 모아놓은 사이트가 따로 있다. '참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란 설명이 덧붙여져 있는데 (공짜라면 일단 떠나고 보는) 참된 나를 찾아 떠났던 여행이었으니 어느 정도 취지에는 부합하지 않았나 싶다.
위 사이트에 들어가면 현재 가능한 템플 스테이를 검색해서 볼 수 있는데 절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나는 그나마 몇 군데 아는 절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그중 하나가 해인사였다. 해인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팔만대장경을 떠올릴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인 나는 딱 거기까지 알고 있었다. 불교에만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역사에도 그다지 흥미가 없는 나였기에. 그래도 조금 더 아는 게 있기는 했다. 해인사가 '경남 합천'에 있다는 것.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해 지명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은 정말 유명한 곳이기 때문이었을 거다.
해인사 템플 스테이를 검색해 본 순간 내가 놀란 건 템플 스테이 프로그램이 좋다거나 다양하다거나 어떤 특별한 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침대방'때문이었다. 템플 스테이라면 요를 깔고 이불을 덮고 또 그 잠자리를 정갈하게 정리해야 하는 이미지였는데 '침대방'이라니. 역시 유명한 절은 다르구나 싶어 냉큼 예약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연이어 템플 스테이를 예약한 이유는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가 엘리베이터 공사를 하는 바람에 매일 15층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해서 힘들었는데 주말에 템플 스테이를 하면 1박 2일은 계단을 오르지 않아 편안할 거란 기대 때문이기도 했다.
이렇게 템플 스테이를 예약을 하고 아이와 같이 갈 예정이라 교육적 흑심으로 이왕이면 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판전 관람도 알아보자 싶어 이번에는 해인사 사이트에 들어갔더니 장경판전은 매주 월요일에만 예약 신청을 받고 내가 가려고 한 날짜의 팔만대장경 순례는 마감된 후였다.(매주 월요일, 한두 달 후의 팔만대장경 순례를 예약할 수 있다. 경험해보지 않았지만 치열한 광클만이 예약에 성공할 것 같다.)
아무리 침대에 낚였다고 해도 팔만대장경을 못 본다면 해인사에 가는 의미가 없을 것 같아 템플 스테이 담당자에게 전화를 했다.
'템플 스테이를 하면서 장경판전을 보려고 했는데 장경판전을 예약해야 볼 수 있는지 몰라서 장경판전은 예약을 못해서 템플 스테이를 취소하고 싶다.' 고 얘기를 했더니,
"템플 스테이를 하시면 그 다음날 장경판전을 볼 수 있어요. 그래도 취소하시겠어요?"
라는 대답을 듣고는 아니라고 꼭 가겠다고 혹시나 말이 잘못되어 취소라도 될까 몇 번 강조해서 가겠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템플 스테이를 하면 예약 없이 팔만대장경을 볼 수 있다니 역시 템플 스테이는 '올 인클루시브'구나 싶어 기대에 부풀었다.
드디어 템플 스테이 당일, 4시간 넘게 운전을 해서 해인사에 도착을 했고 예약한 침대방을 안내받았다.
방의 전등마저 리모컨으로 키는 최첨단 시설을 자랑하고 있었다. 안내해주는 직원 분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불도 못 켤 뻔했다. 침대만이 아니라 책상도 있었는데 핸드폰 충전기까지 놓여 있어 웬만한 호텔 서비스보다 좋다는 생각을 했다.
짐을 풀고 세미나 실에서 오리엔테이션을 받고(마치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 분위기의 건물이었다.) 해인사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해인사가 팔만대장경으로 유명하니 고려시대 지어진 것으로 생각해버린(나 같은 사람) 사람들도 있겠지만 해인사는 신라시대 애장왕 때 지어진 것이고, 팔만대장경은 강화도에서 보관하고 있던 것을 조선시대 장경판전을 지어 옮긴 것이라고 한다.
또 절 안에는 미로 같은 길이 있어서 사람들이 그 길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는데 '해인도'라고 의상대사가 불교를 상징하는 만(卍) 자를 발전시켜 화엄경을 요약해서 쓴 것을 형상화해서 만들어 놓은 길이었다. 나는 이 길이 과거의 길이 아니라 기하학적인 모양 때문에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는 미래의 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 해인도가 해인사의 로고인 것처럼 여기저기 그려져 있고 심지어 베갯잇에도 자수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법당인 대적광전 앞에 해인사 삼층석탑이 있었고 탑 끝에 작은 종이 달려 있었다. 마침 저녁의 차가운 바람이 불어 그 종이 흔들려 영롱한 소리가 나는데 산사의 적막함을 가르며 울려 퍼지는 그 종소리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바람과 같은 내 마음에 잔잔한 파동을 주고 있었다.
저녁 공양 후 프로그램은 108배였는데 지난번 108배를 경험한 아이는 이번에는 안 한다고 했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고 나도 함께 잠이 들었다. 지난번에는 나 혼자 새벽 예불을 갔었는데 이번에는 아이도 일찍 일어나서 4시 반에 새벽 예불에 같이 참석했다.
템플 스테이 숙소에서 법당까지는 언덕도 있고 걸어서 10여분은 걸리는 거리였는데 아이는 그 거리를 오가는 것을 힘들어하면서도 즐거워했다.
새벽 예불은 두 번째 경험이지만 이번에 달랐던 점은 많은 스님들이 한꺼번에 염불 하는 소리를 들으니 마치 아카펠라를 듣는 것처럼 경건한 목소리로 아침부터 귀가 깨끗해지고 마음마저 청량해지는 것 같았다.(역시 올 인클루시브!!)
새벽 예불을 마치고 방에 돌아왔다가 다시 여섯 시에 일어나서 아침 공양을 갔는데 스님이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한 우리를 보더니 춥다고 안에서 기다리라고 배려해주셨다. 이럴 때마다 템플 스테이의 엄격함은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생각을 했고 사람들을 배려해주시는 스님들의 마음에 감동했다.
아침을 먹고 와서는 아이도 나도 너무 졸려서 다시 잠이 들었다. 그 이후 프로그램은 8시 반에 '암자 길 걷기'를 하면서 장경판전에 들어간다고 하는 그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그전에 아침이 너무 이른 시간이라 못 먹은 사람을 배려해서인지 아침 간식을 준다고 해서 가보았더니 토마토 수프와 빵, 샐러드와 커피가 준비되어 있었다. 너무 맛있고 양도 많아서 호텔로 비유하자면 아침 뷔페를 먹고 와서 '클럽 라운지 조식'을 또 먹는 느낌이었다.
나는 왜 해인사 템플 스테이에 '암자 길 걷기' 프로그램이 있을까 싶었다. 해인사 안내 책자를 봐도 해인사 안의 건물에 대한 설명은 있지만 해인사 밖의 암자들에 대해 설명이 있는 책은 보지 못했다. 템플 스테이를 하지 않았다면 해인사에 왔더라도 팔만대장경 정도만 보고 가지 않았을까 싶은데 템플 스테이 덕분에 해인사의 많은 암자들, 그리고 그 암자들의 매력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매력을 알기 위한 노력이라 하기에는 많이 오르막 길을 걸어야 해서 15층 계단을 피하려고 선택한 템플 스테이에서 그 이상을 걷는 것만 같아 인간의 업보(destniy)란 이렇게 피할 수 없구나 하는 운명론적 생각도 들었다.
스님의 친절하고 눈높이에 맞춘 설명과 함께 내게는 등산로와 맞먹는 길을 걸어서 '원당암'에 도착했더니 눈에 들어온 것은
이 유명한 글귀였다.
그저 유머로만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혜암 스님의 벼락같은 화두였다고 했다. 여기서의 공부는 단순한 학교 공부나 시험공부가 아니라 마음공부이자 인생공부였고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침대에 낚여 그저 미천한 지식으로 팔만대장경을 보고자 왔던, 일상의 괴로움인 15층 계단을 피해 왔던 내가 가파른 언덕길을 타의 반 자의 반 올라와서 본 글귀가 이것이라니.
'그래. 나도 아직 멀었구나.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구나.'라는 깨달음을 이렇게 얻다니.
가파른 원당암길을 내려와서 드디어 장경판전으로 향했다.
사진을 찍을 수는 없지만 사진으로 많이 본 장경판전의 풍경을 눈앞에서 실제로 보고 있으려니 천년 전의 '도서관'을 보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도서관'을 좋아하는 나로서 과거에 살았다면 이곳에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봤다.
장경판전을 마지막으로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는 스님이 직접 만드신 연꽃차와 수제 초콜릿을 대접받았다.
늦은 오후의 햇살, 차 한 모금, 입에 넣자마자 살살 녹는 초콜릿, 그리고 씬 스틸러로 등장한 검은 고양이가 나의 두 번째 템플 스테이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 유명한 해인사를 너무 늦게 와봤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모든 게 때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해암 스님은 '공부하다 죽어라'라고 하지 않았을까. 템플 스테이로 오지 않았다면 나는 해인사를 그저 유명한 절, 팔만대장경은 유네스코 등재된 문화재 정도로만 알고 돌아갔을 것이다. 침대에 낚인 템플 스테이 덕분에 깨달음도 얻어 간다.
이번에도 템플 스테이는 '깨달음'까지 '올 인클루시브'다.
공부하다 죽어라
그래, 또 가보자. 템플 스테이를 하다 죽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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