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
새로운 시작-그토록 새로 시작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가끔은 익숙한 삶에서 벗어나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혹은 별 볼 일 없는 자신에게 새로운 시작이 있었으면 하고 갈망하기도 한다.
아침에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면 어제 살던 집에서 오늘도 똑같이 일어나서 씻고 아침을 먹고 회사로 향한다. 회사에서도 어제와 똑같은 상사와 동료들 사이에서 어제와 비슷한 일을 한다. 오후에는 가끔 연락하던 친구가 와서 무슨 일이 없냐고 묻는다. 아무 일도 없다고 대답하면서 제발 ‘무슨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데 그 새로운 시작은 ‘로또’에 당첨되는 것일 수도 있고,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결혼’ 일 수도 있고, 또 해외 생활을 위해 떠나는 경우일 수도 있고, 그리고 사람마다 꿈꾸는 각자의 ‘새로운 시작’이 있지 않을까?
처음에 ‘새로운 시작’이라는 제목에 끌려서 이 책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책 표지에는 아이의 발이 보이고 그 앞에 작은 웅덩이가 있고 공 하나가 놓여 있다. 마치 그 공이 ‘새로운 시작’인 것처럼. 그 공을 지금이라도 찬다면 새로운 시작이 되는 걸까? 그렇다면 내 앞에 놓인 공이 있지 않을까.
나는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꿈꾸었던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한 곳에 일 년 이상 머물지 않았다. 서울, 인천, 대전 등 국내에서 이사를 다닌 것만 해도 여러 번이고, 일본, 호주 등 해외도 많이 돌아다녔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하고 재혼도 했다. 그 무수한 변화는 아마도 내가 새로운 시작을 꿈꾸었던 증거가 아닐까 싶다.
요즘의 흔한 말로 ‘자유로운 영혼’으로 평생 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무수한 시도 속에서 진짜 새로운 시작이 되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이었던 결혼도 이혼도 재혼도 겪고 보면 ‘새로운 시작’이라 하기엔 역부족한 느낌이었다. 아마도 그만큼 환경보단 진짜 변하기 어려운 건 나 자신이지 않을까.
이 책의 시작은 ‘마침내 전쟁이 끝났어’로 시작한다.
나는 한 개인의 ‘새로운 시작’을 생각하며 책장을 펼쳤는데 내 예상과 달리 ‘전쟁 이야기’라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전쟁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전쟁이 끝난 후에 시작되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이 책에 등장하는 가족은 전쟁이 끝났지만 돌아갈 집이 없어서 차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나는 ‘전쟁’을 겪은 세대가 아니라 전쟁이란 영화나 다큐멘터리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혹은 부모님에게서 한국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가끔 들은 정도였다.
그래서 전쟁 후에 어떤 새로운 시작이 있었는지는 잘 모른다. 전쟁으로 인해 집을 잃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냈는지… 우리는 그런 부모들의 자식이면서도 말이다.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전쟁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모든 집에 불을 지르고 퇴거하란 명령이 내려졌을 때 최후까지 기다리다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 그때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났고 내가 태어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차에서 생활을 시작하고, 입고 있는 옷이 낡아서 못 입게 되자 아빠는 빨랫감이 준다고 긍정적으로 얘기해준다. 옷을 입은 채로 강에 들어갔다가 양지바른 곳에 누워 몸을 말리기도 한다.
아마도 아이들에게 절망보다 희망을 알려주고 싶은 아빠의 마음이었을 것 같다.
그리고 주변은 온통 깨진 유리조각과 잿더미만 있다고 한다. 상상이 잘 되지 않지만 그림책에는 모든 것이 폐허로 변한 도시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아이가 놀이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시선은 가족에서 아이들로 옮겨간다. 그리고 다음 날엔 어떤 아이가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어떤 날은 요리사 아저씨가 요리 이야기를 해주는 것을 들으며 아이들은 배고픈 것을 잊을 수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들은 놀고 있고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는 파티 같다고 한다.
단순히 개인의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이 책을 봤던 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숙연해지고 말았는데 그것은 이 책에서 주는 전쟁에 대한 ‘반전’의 메시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쟁을 소재로 했지만 전쟁 후 폐허가 된 도시에서 새로운 시작이 되는 건 아이들의 ‘놀이’라는 대목에서 남의 전쟁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아이를 키우는 ‘내 이야기’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어른들은 어땠을까. 살아갈 집을 잃고 보살펴야 하는 아이들이 있었으니 근심과 고통의 나날이 아니었을까. 우리나라에서도 전쟁 후 고아가 많이 생겨났고 그래서 그 고아들을 해외로 입양 보내며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이런 어려운 시절 속에서 ‘새로운 시작’이 되었던 것은 이 책에서 나온 대로 아이들의 작은 놀이가 아니었을까. 아이들의 작은 놀이가 웃음을 되찾게 하고 그 아이들의 웃음이 어른들에게 다시 살아가야 할 힘을 주었을 것이다.
막상 아이를 키워보니 아이들이라고 어른들의 어려운 상황을 모르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어린아이들도 자신들의 상황이 어떤지를 느낌으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살아갈 힘을 ‘놀이’에서 찾은 게 아닐까. 아이들은 거창한 장난감이 없어도 주변의 물건들로 금방 놀이를 시작하는 힘이 있다. 그런데 그 놀이는 어른들이 보기엔 ‘놀이’이지만 아이들에겐 ‘살아가는 힘’이 아닐까.
그리고 그 폐허 속에서 아이들이 놀이를 하며 웃는 웃음은 진짜 ‘새로운 시작’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새로운 시작을 꿈꾸던 나는 43살에 첫 아이를 키우며 진정한 ‘새로운 시작’을 경험하고 있었다. 마흔 넘게 살면서 많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아이와 함께 만난 세상은 정말 새로운 세상이었다. 아이가 없을 때 보이지 않았던 집안의 날카로운 모서리들. 아이가 없을 때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기저귀 광고들. 아이가 없을 때 와 닿지 않았던 보험 광고들. 아이가 없을 때 보이지 않았던 노란 셔틀버스들. 아이가 없을 때 보이지 않았던 상가 건물의 학원들.
같은 나라 같은 시간대에 살고 있었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그야말로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보면서 다시 한번 느끼게 된 것이 일상에서도 아이들의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고 또 전쟁 속에서도 아이들이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진짜 어른이 되는 새로운 시작은 ‘아이를 키우는 일’이 아닐까. 아마 이 말에 아이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그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일들은 매트릭스가 아니라 ‘육아’에서 경험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른으로 성장할 수많은 기회를 제공받는 것 같다.
<새로운 시작>
저자: 파울라 카르바예이라 출판사: 노란 상상, 2013
스페인 작가 파울라 카르바예이라의 ‘새로운 시작’은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도시에서 다시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남미의 홈리스, 뉴욕의 홈리스들이 전쟁의 참전군들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전쟁이 대량 살상을 하고 자원을 파괴하고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폐해도 크지만 전쟁 후에도 사람들을 황폐하게 한다는 것까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많은 정부에서는 참전군들이 돌아왔을 때 다시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까지 생각하지 않고 그들을 방치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홈리스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 보면 한참 자신의 직업을 갖고 미래를 위해 일할 나이에 전쟁에 다녀온 것이니 어떤 대비를 할 수 있었을까. 그런 그들이 홈리스가 되는 건 어쩌면 예상된 경로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전쟁만이 아니라 전쟁 끝에 다시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새로운 시작’이란 제목으로 이야기는 한 것 같아서 의미 깊게 느껴졌다. 비록 전쟁 보단 내 개인의 ‘새로운 시작’을 먼저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전쟁이 인류에게 준 피해가 얼마나 큰 지는 느낄 수 있었다. ‘반전’이란 큰 메시지를 아이들의 시선으로 정말 잘 담고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