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

by 북도슨트 임리나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어른이 된다는 건 탄생의 시간에서 멀어지면서 죽음의 시간으로 가까이 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이 적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조금 더 자주 하게 되고 어느 순간에는 내 일이 될지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너무 당연한 일이면서도 힘겨운 일이지만 주변의 죽음을 어렸을 때보다 많이 접하기도 한다. 우리 부모님들 나이는 죽음이 이상한 나이도 아니니 내 아버지만이 아니라 친구의 아버지, 또 친척분들 이미 주변의 죽음에 대해 많이 경험하고 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죽음에 대해서 그 전과는 달리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죽음에 임박해 있음을, 믿고 싶지 않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죽음의 과정들, 그리고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사후의 일들. 죽음이란 단순하지 않았다. 죽음도 과정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감정과 일들이 그 안에 있었다.


종교가 생겨난 이유가 인간에게 ‘죽음’이 있기 때문이란 말도 이해가 되었다. 인생에서 많은 것들이 노력하면 또 인간의 의도와 의지로 가능하다면 죽음만은 신의 영역일 수도 있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가장 마지막의 일이 ‘죽음’이 아닐까.


그렇지만 탄생이 있으면 당연히 죽음이 있는 것이고 ‘죽음’ 또한 두려운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이치라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다고 해도 막상 나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접하게 되면 ‘당연함’이 아니라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막고 싶고 또 막상 눈앞에서 죽음을 목격하더라도 부정하고 싶어 진다.

마치 결혼식을 하고도 또 남편과 한 집에 살면서도 초반에는 ‘결혼’이란 것을 실감하기 어려운 것처럼 죽음 또한 ‘장례식’을 치르고도 실감하지 못하는 시간들을 맞이하게 된다.

나 또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꿈속에서는 여전히 살아 계셔서 꿈을 깨고는 여러 번 놀라기도 했다.


왜 사람은 영원히 살지 못할까?

우리는 이렇게 타인의 죽음도 받아들이기 힘겨워하는데 막상 자신의 죽음은 어떨까 싶다. 아이가 태어날 때 스스로 어떻게 태어나는지 모르게 태어나듯이 죽을 때도 자신도 모르게 죽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탄생의 순간에 대해서 기억하거나 얘기할 수 없듯이 죽음의 그 순간도 누구도 얘기할 수는 없다.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은 평생 홀로 살았던 오필리아가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이야기이다.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작았던 오필리아는 평생 객석이 보이지 않는 작은 상자에서 배우들이 대사를 잊어버릴 때 관객들이 들리지 않게 대사를 얘기해주는 직업을 가졌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오필리아도 나이가 먹고 더 이상 사람들이 많이 연극을 찾지 않게 되자 더 이상 오필리아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 오필리아에게 나타난 것은 ‘그림자’였다. 주인을 잃은 그림자라고 소개하자 오필리아는 자신에게 오라고 한다. 이미 있는 하나의 그림자와 사이좋게 지내면 된다고 한다. 그렇게 그림자 두 개를 가지게 된 오필리아에게 또 다른 주인을 잃은 그림자들이 찾아온다.


그림자들과 살게 된 오필리아는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게 되고 심지어 살고 있던 집에서도 쫓겨난다. 그렇게 길을 떠난 오필리아는 낯선 곳에 도착하게 되는데 그때 그림자들은 오필리아의 살아갈 방편을 마련해주기 위해 그림자들이 배우가 되어 연극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연극은 대 히트를 하게 되고 자동차 한 대를 구해 ‘오필리아 그림자 극장’이란 이름으로 전 세계를 다니며 연극을 하게 됩니다.

여기까지 보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홀로 된 노인이 친구도 얻고 직업도 얻게 되었다는…그러나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필리아가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눈보라 한가운데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을 때 아주 큰 그림자가 나타난다. 그 그림자는 다름 아닌 ‘죽음’이었다. 오필리아는 그 그림자를 받아들인다.

그러자 오필리아 앞에 펼쳐진 곳은 천국이었고 주위에는 아름다운 이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둘러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끌려 간 곳은 ‘오필리아의 빛 극장’이었고 천사들 앞에서 공연을 했다고 한다.


나는 책을 덮고도 오래 여운이 남았다.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에서 빛의 극장이 되기까지는’ 죽음’의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목도 ‘오필리아 빛의 극장’이 아니라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이라는 것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리고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이 있어야 ‘오필리아 빛의 극장’이 있을 수 있었다. 마치 삶의 죽음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겪는 것을 부정적인 경험이라고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실의에 빠져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타인의 죽음을 겪은 후에 남은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죽은 사람과 추억을 가슴에 담은 채. 그럴 때 다른 사람의 죽음은 어떤 의미가 될까?


내가 몇 년 전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면서 상실감, 분노, 슬픔 등의 감정을 지나 가장 마지막에 찾아온 것은 ‘삶의 의지’였다. 언젠가 내 생의 끝나 하늘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면 혹은 지금이라도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는 아버지에게 나는 열심히 살고 있는 딸이고 싶었다.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남은 삶을 성실하게 살다가 죽음의 순간에는 먼저 간 나의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기쁜 마음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지 않을까.

오필리아처럼 그림자 극장이 ‘빛의 극장’이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어렸을 때보다 ‘죽음’에 대해 자주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라면 타인의 죽음을 보며 내 죽음을 생각해 보는 과정을 통해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 아니라 ‘삶’이었다. 죽음은 삶과 동떨어진 곳에서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의 한 순간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처음에 오필리아에게 찾아온 그림자들은 ‘죽음’이 아니었다. 실의에 빠진 오필리아에게 새 삶을 살게 해 주었지만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그 죽음마저 오필리아는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오필리아가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동안 그림자를 받아들여서 경험을 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가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서일까?

죽음에 대해 많은 경험을 한 것은 아니지만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오필리아 그림자 극장’의 여운이 오래 남는 것 같다.


아직 생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이 되지만 어렸을 때보다는 ‘죽음’에 대해 조금 더 많이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는 나이가 되어간다는 게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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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

글: 미하엘 엔데 그림: 프리드리히 헤헬만 출판사: 베틀북, 2001

미하엘 엔데는 시간 도둑과 시간을 지키려는 소녀의 판타지 이야기로 유명한 유명한 소설 ‘모모’의 작가이다. 오필리아 그림자 극장이란 어쩌면 인생 가족이 없는 여자의 인생 마지막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가족이 없이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부분을 주인 잃은 그림자를 받아들임으로 해서 자신의 노년을 빛나게 살고 또 그 대가로 천국에 가서는 빛의 극장이 된다는 내용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죽음’이 천국, 빛으로 가는 길이라는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