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에게나 상처를 준다

슬퍼하는 나무

by 북도슨트 임리나
슬퍼하는 나무-결국, 우리는 알지 못한 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


살다 보면 우리는 잘잘못을 따지는 경우에 많이 놓이게 된다. 심지어 네 잘못이 크네, 내 잘못이 크네 잘못의 크기를 비교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교통사고가 아닐까 싶다. 내 잘못인지 상대의 잘못인지 퍼센트로 나누기도 한다. 아무리 내 잘못이 없다 하더라도 10%의 책임을 무는 경우도 있고 만약에 100% 내 잘못이 아닌 판정이 나올 경우에는 마치 전쟁의 승리자라도 된 느낌이다. 그리고 그 판정의 결과는 결국 책임져야 할 돈의 분량의 많고 적음과도 연결된다.


어렸을 때는 ‘죄송합니다’라고 한 마디만 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 것들이 어른이 되면 말뿐이 아니라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도 돈으로 책임을 지라니 냉혹한 어른들의 세계이다.

그러나 또 다른 상황에서는 이렇게 잘잘못을 명확히 나눌 수 없다는 걸 알아서 더 혼란스럽다는 것도 어른들의 세계이기도 하다.

다 된 것 같은데 결국 누락된 승진, 아깝게 1점 차이로 떨어진 시험, 평생의 배우자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유부남이었던 그 남자.

이럴 때 우리는 쉽게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 혹은 상황에 대해서 탓을 하기도 한다.


‘이번에 승진이 누락된 건 내 탓이 아니야. 김대리가 이 부장하고 자주 술 마시더니 결국 아부를 많이 해서 된 거야.’

‘시험에 떨어진 건 내가 공부를 안 해서가 아니라 문제를 너무 꼬아서 냈어. 출제자가 잘못한 거지.’

‘그 남자 알고 보니 유부남이었대. 진짜 파렴치한 놈이야.’ 등등.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내 탓도 아니지만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또 의도하지 않아도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슬퍼하는 나무’라는 그림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마지막에 ‘너 때문에 난 외로워졌어’라고 등장하는 나무를 보며 알을 가지려 했던 소년과 알을 지키려는 어미 새의 싸움이 가져온 결과가 단순히 누가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소년은 새 둥지에서 알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알을 가져가고 싶어 한다. 그런데 어미 새는 화를 내며 소년을 막기보다는 살살 달랜다. 알에서 깨어 새끼가 나오면 그때 가져가라고 말이다. 소년은 또 기다린다. 알에서 새끼가 나오자 어미 새는 또 말한다. 새끼들이 좀 더 크면 가져가라고. 소년은 또 기다린다. 그러자 새는 새끼들이 날 수 있게 되자 새끼들을 데리고 빈 둥지만 남겨 놓은 채 떠나가 버린다.


여기까지 보면 새끼들을 지키려는 새의 모성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리고 소년의 입장에선 어미 새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때 등장하는 나무. 지금까지는 배경으로만 있던 나무가 목소리를 낸다.


“너 때문에 나는 혼자가 되었다고.”

새끼 새를 갖지 못한 소년이 피해자인 듯 보이나 그동안 새 둥지를 틀었던 나무는 혼자가 되는 피해자가 된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의도하지 않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며 사는 게 아닐까. 그래서 누구의 잘못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상황이 많은 게 아닐까.


나 또한 그랬다.

내가 인생을 살아가며 많이 힘들었던 과정 중에 하나가 ‘이혼’을 겪었던 시기였는데 이혼이란 과정에서 모든 원망은 전남편에게만 돌렸다. 그리고 최대의 피해자는 나라고만 생각했다. 마치 새에게 속아서 새끼를 가지지 못한 소년처럼 말이다. 또한 그 이후의 이혼녀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에 대해서 경험하면서 이래서 여자인 ‘내’가 피해자라고만 생각했다.


아마도 그렇게 해야만 내가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나에게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나약한 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었을지도.

그런데 내가 어느 정도 자아의 힘이 생기고 나자 나만이 아니라 내 주변 사람을 볼 수 있는 시야가 넓어지자 나만이 피해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결혼이 개인과 개인의 결합이 아닌 것처럼 이혼 또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내 이혼이 가져온 문제는 당사자인 나만이 아니라 이혼의 과정에서 상심했던 부모님과 형제들 또한 나와 비슷한 힘겨운 시간을 겪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가해자라고만 생각했던 전남편 또한 ‘상처를 받은 피해자’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데는 참 오래 걸렸다. 만약에 내 부모가 혹은 내 동생들이 이혼한다면 내 맘이 편했을까를 생각해보니 쉽게 이해가 되는 일이 나만이 피해자라고 생각했을 때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다들 알지 못한 채 상처를 주면서도 자신만이 피해자라는 좁은 시야를 갖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나는 나만이 힘든 시기를 겪었다는 생각에서 그 당시 나와 함께 힘든 시기를 견뎌준 가족들이 감사했다. ‘감사’란 통찰력에서 온다는 말은 정말 맞는 말이다.


혹시 내가 이번에 승진이 누락되었더라도 시험에 떨어졌어도 또 남자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조금 더 넓은 시야로 그것이 나만의 어려움이나 슬픔이 아니라 생각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힘을 내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슬퍼하는 나무’는 내가 피해자란 생각이 들 때도 나 말고도 또 상처 받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해 준 무엇보다 소중한 그림책이다. 그래서 그림책 속으로 뛰어들어가 ‘슬퍼하는 나무’에게 더 이상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고 싶다.



슬퍼하는나무.jpg

<슬퍼하는 나무>

저자: 이태준, 그림: 와이 출판사: 예림당, 2007


이태준 작가는 1925년에 단편 <오몽녀>로 데뷔했고, 많은 단편소설을 발표했으며 우리나라의 대표적 단편소설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나는 그림책 ‘슬퍼하는 나무’로 접하기 전에 대학교 시절 <문장강화>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은 적이 있다.

<슬퍼하는 나무>보다 더 많이 알려진 작품이 <엄마 마중>인데 전차 정류장에서 한 겨울에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과 마음을 그려 심금을 울린다.

1946년 월북 후에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고 하나 결국에는 숙청되었다고 한다.

그림 작가 ‘와이’는 <슬퍼하는 나무>의 자연스러움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물과 물감만을 사용해서 그렸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아름다운 수채화의 세상이 펼쳐지는 것도 이 책의 감동을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