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단한 왕이 아닌 고뇌에 찬 인간 이도의 모습을 본다
-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줄거리
조선시대 세종대왕(이도)의 한글 창제 과정에서 벌어지는 집현전 학사들의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드라마. 2011년 SBS에서 방송됐으며 한석규(이도 역), 장혁(똘복·강채윤 역), 신세경(다미·소이 역), 윤제문(가리온 역) 등이 연기했다. '선덕여왕', '히트', 육룡이 나르샤' 등을 집필한 김영현·박상연 작가의 작품. '쩐의 전쟁', '바람의 화원', '별에서 온 그대' 등을 만든 장태유 PD와 '아내의 유혹', '육룡이 나르샤'를 만든 신경수 PD의 작품.
세종대왕.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태어나면서부터 한글을 배우며 수차례 듣는 이름이죠. 한글을 만든 조선의 왕이자 성군이며 늘 인자한 모습으로 비춰집니다. 초등학교나 광화문 광장 한가운데에 책을 들고 앉아있는 모습이 그를 상징하죠.
"지랄하고 자빠졌네" "우라질" 갑자기 왠 욕이냐구요?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세종대왕, 즉 이도가 이렇게 등장합니다. 욕설이 갖는 찰진 어감과 서민들의 감정을 이해하는 왕, 색다른 세종대왕의 모습이죠.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는 큰 틀에서 추리극입니다. 한글 창제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집현전 학사들의 연쇄살인 사건을 파헤치는 스토리가 극 초반 주를 이룹니다. 세종대왕 이도를 중심으로 한 한글창제파와 이에 맞선 정도전의 핏줄 정기준의 대결이죠. 밀본이라는 이름의 반대 조직이 형성돼 이도를 압박합니다. 집현전 학사들의 죽음이 바로 그 압박 중 하나죠. 이 드라마는 집현전 학사들을 살인하는 이유부터 살인을 저지르는 집단의 수장 정기준이 누구인지까지 시청자들로 하여금 미궁 속으로 빠지게 합니다.
여기까지가 이 드라마를 처음 보는 시청자들이 집중하게 되는 요소입니다. 이도와의 팽팽한 대립과 정기준에 대한 정보를 궁금해하면서 호기심을 갖고 볼 수밖에 없게 되죠. 그렇다면 이미 극 중에서 숨겨둔 비밀들을 안 시청자들이 볼 수 있는 요소는 어디일까요. 이 드라마를 다시보는 시청자들이 집중할 수 있을 만한 포인트는 좀 다릅니다.
세종대왕의 재발견, 이도의 고뇌에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한글이라는 언어 매개체를 통해 세종이 겪는 내면의 갈등을 깊게 들여다봅니다. 위대한 왕이라는 환상이 아닌 철저히 인간으로서의 이도를 들여다보죠. 한글이 이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진 않을지 끊임없이 궁리하고 왕이라는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항상 고민하죠.
이도의 고뇌는 드라마 곳곳에서 대사로 옅볼 수 있습니다.
# 씬1. 드라마 6회(링크는 동영상)
이도(한석규 님)는 집현전 학사 한명이 또 다시 살해되자 자책하기 시작합니다. 한글 창제의 뜻을 품고 한걸음씩 나아가던 이도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누군가의 목숨이 희생된다는 점에 큰 혼란과 자책감을 느끼기 시작하죠. 그의 곁에서 고목처럼 단단하게 버티고 선 소이(신세경 님)는 혼란스러운 그를 끝까지 믿고 잡아나갑니다.
이도 "또 죽였다 내가."
소이 '전하의 책임이 아닙니다.'
이도 "지금 뭐라 하는 것이냐. 내 책임이다. 내가 죽인 것이야. 이 조선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내 책임이다. 홍수가 나고 벼락이 떨어져도 내 책임이야. 그게 임금이다. 모든 책임을 지고 그 어떤 변명도 필요 없는 자리. 그게 바로 조선의 임금이란 자리다. 헌데 니까짓게 뭐길래 감히 내 책임이 아니라 하는 것이냐. 내 사람들이 내 일을 하다가 죽었다. 내가 죽인 것이야."
소이 '전하의 책임이 아니옵니다. 전하의 책임이 아니옵니다. 전하의 책임이 아니옵니다. 전하의 책임이 아니옵니다. 전하의 책임이 아니옵니다. 전하의 책임이 아니옵니다. 전하의 책임이 아니옵니다.'
이도 "어명이다. 울지마라. 날 위해 단 한방울의 눈물을 흘려서는 아니된다."
극 중 소이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실어증에 걸려 이도가 준 붓과 종이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죠. 소이는 온몸으로 집현전 학사의 죽음이 결코 이도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도는 자신보다 더 자신을 믿으며 이렇게 글로 울부짓는 소이를 향해 손을 내밀고 함께 가슴 아파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스스로를 다잡게 되죠.
# 씬2. 드라마 8회
성인 이도 역을 맡은 한석규 님과 어린 이도 역을 맡은 송중기 님이 동시에 나타나 스스로 내면에서 싸우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폭력으로 치세를 했던 태종 이방원과는 달리 문(文)으로 치세하겠다며 철학을 세웠던 이도가 집현전 학사들의 죽음으로 인해 스스로 자신의 철학에 의문을 품는 것이죠.
성인 이도 "모든 권력에는 독이 있어. 그 독을 바깥으로 뿜지 않으면 이렇게 안으로 썩는 것이다."
어린 이도 "해서?"
성인 이도 "권력의 독을 안으로 감추겠다고? 오직 문으로 치세를 하겠다고? 퉷(침을 뱉는다). 네놈의 그 한심하고 잘난 결심이 이렇게 만든 것이야. 네놈이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네 사람을 죽인 것이다. 내가 아니라 너다. 내가 아니라 네가 죽인 것이야."
어린 이도 "허면 아직 늦지 않았다. 이방원의 무덤 앞에 가서 눈물 흘리며 사죄해라."
성인 이도 "이놈이 감히."
어린 이도 "이방원이 왜 이방원인가, 이도가 왜 이도인가. 그것밖에 되지 않으니 이도인게지."
성인 이도 "그만해. 그만해."
이 드라마는 이렇듯 나약하고 마음의 병을 안고 살아가는 이도의 모습에 주목합니다. 그런 그를 채찍질하고 한발씩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사람, 백성이자 노비인 강채윤입니다. 이도가 한글을 창제하게 된 이유가 결국 똘복이(강채윤의 어릴쩍 이름)를 구하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죠.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왕과 가장 낮은 곳에 있던 노비가 서로를 보완해주는 존재임을 통해 한글이 위대한 성과물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는 명대사가 참 많습니다.
한글 창제 과정에서 이도가 끊임없이 부딪혔던 논리적인 모순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모두 대사로 표현되죠. 우연히 하게 된 정기준과의 끝장 토론이나 대신들과의 논의가 모두 그러한 과정의 일부죠.
가장 명장면으로 꼽을 수 있는 건 무엇보다 강채윤과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는 씬입니다. 사실 논쟁이라기보다는 논리적 모순에 부딪혀 탈출구를 찾지 못하던 이도를 강채윤이 일으켜세우는 모습이랄까요. 왕이 생각해내지 못했던 답을 노비인 강채윤이 온몸으로 격렬하게 울고 소리치며 전합니다. 그 과정에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고 묘한 쾌감과 묵직함이 다가오죠.
14회에서 강채윤은 이도를 찾아와 글자를 만드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강하게 묻습니다. 한글 창제가 마치 백성을 위한 것인냥 백성을 속이고 있는 것이라 외치죠. 글자를 안다고 한 들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책임만 뒤집어 쓸 것이라 단언합니다. 강채윤은 백성들이 왕에게 던질 수밖에 없는 그 질문을 강한 어조로 쏘아붙입니다.
14회(링크는 동영상)
그 답은 20회에 나옵니다. 사실 한글 창제가 결국 왕으로서의 책임이 너무 무거워 백성들에게 나누려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죠.
"아무리 글자가 쉬워도 그 글자로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건 사대부나 양반이지 절대 백성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제가 담이를 데리고 도망가지 못한 건. 우리 다미가 하고싶은 게 있다는 게 신기해서였습니다. 제가 아는 백성 중에 하고싶은 게 있는 백성이 있다는 게 너무나 신기하고 너무나 부럽고 나도 닮고 싶어서. 혹여나 글자를 알면 그리 될까, 나도 하고 싶은 것이 생길까, 내가 욕망하는 것이 생길까."
20회(링크는 동영상)
이도는 자신의 아들마저 죽은 극한의 상황에서 한글 창제가 갖는 의미를 노비인 강채윤을 통해 찾게 됩니다. 백성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글자를 통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삶에 대한 의지를 심어주는 것, 그것이 왕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고 현재까지 해왔던 일의 의미라는 점을 깨닿게 됩니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는 대사와 연출, 연기력까지 삼박자를 고루 갖춘 대박 드라마 입니다. 김영현, 박상연 작가는 드라마 '대장금', '선덕여왕', '로열패밀리' 등을 거쳐 왕이라는 존재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은 고뇌를 대사 곳곳에 담았습니다. 장태유, 신경수 PD는 극중 대결 구도를 팽팽하게 구성하고 배우들이 카메라 속에서 절로 놀 수 있도록 했죠. 배우 한석규는 그야말로 이도의 모습으로, 틀에 박히지 않은 세종대왕의 모습으로 시청자들 앞에 섰죠.
드라마 곳곳을 천천히 들여다보며 다시 한번 즐겨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