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을 떠나 판타지의 세계에 빠지고 싶다면
드라마 <태왕사신기> 줄거리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일대기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서사 무협 드라마. 2007년 MBC에서 방송됐으며 배용준(광대토대왕·담덕 역), 문소리(서기하 역), 이지아(수지니 역), 최민수(화천회 대장로 역) 등이 연기했다. 아역은 유승호(광개토대왕·담덕 역), 박은빈(서기하 역), 심은경(수지니 역) 등이 연기했다. '모래시계'와 '여명의 눈동자', '인간시장' 등을 집필한 송지나 작가와 '카이스트'를 쓴 박경수 작가가 쓴 작품. 연출은 '모래시계', '수사반장', '여명의 눈동자' 등을 만든 김종학 PD와 '탐나는도다', '사임당' 등을 연출한 윤상호 PD의 작품.
드라마 '태왕사신기'는 완벽한 판타지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드라마입니다.
국내 드라마 가운데 판타지를 다루는 드라마는 흔치 않습니다. 사회 정서상 판타지물이 전 연령대를 대상으로 하는 드라마로 만들어지기가 쉽지 않죠. 적어도 16부작 이상 방영되는 드라마 환경 속에서 CG등에 투입될 막대한 자금도 발목을 잡습니다. 요즘은 tvN '도깨비'나 '화유기'와 같은 판타지물이 종종 등장하곤 하지만 무려 10년 전 방송됐던 점을 감안하면 그 당시 획기적인 기획이라 볼 수 있죠.
판타지물이라는 점에서 태왕사신기를 보고 있으면 최근 개봉한 영화 '신과함께'가 떠오릅니다. 현실과의 접점을 최소한으로 두고 시청자를 완벽한 판타지의 세계로 이끌어주기 때문이죠. 그만큼 볼거리가 굉장히 많은 드라마입니다. 지금의 CG 기술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겐 아쉬울만한 CG가 종종 있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 때가 크긴 합니다.
하지만 CG를 연기력으로 커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악(惡)'을 연기하는 화천회 대장로 역의 최민수인데요. 그야말로 '미친' 연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람인지 괴물인지 정체 모를 모습으로 연기하죠. 목소리나 표정, 눈빛이 그야말로 악귀에 가깝습니다. (칭찬인지 욕인지... 다른 연기자에 대한 얘기는 뒤에서 다시 하겠습니다.)
태왕사신기는 출연 인물이 많습니다. 주인공인 담덕(배용준) 외에도 다른 남자주인공인 연호개(윤태영)과 두 여자주인공인 기하(문소리), 수지니(이지아). 그리고 네 개의 신물과 그 주인공 등. 조연이 대거 등장합니다. 주요 인물 관계도가 제시돼 있지만 관계도에 나오지 않는 인물들이 꽤 많습니다.
출연인물이 많으면 PD와 작가의 역할이 중요해집니다. 각 역할과 위치를 조율하지 않으면 스토리가 산으로 가거나 역할이 산만해져서 시청자들이 극을 이해하기 힘들어지죠.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이야기를 잘 풀어 나갑니다.
모래시계나 여명의 눈동자를 쓴 송지나 작가와 김종학 PD의 역량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최민수나 박종원 등 모래시계에 나왔던 배우들이 곳곳에 보이는 이유도 이러한 인연 덕분입니다. 연출진들이 조화롭게 작품을 만들면서 출연자가 많아도 담덕을 중심으로 연호개와의 갈등, 기하·수지니와의 묘한 관계 그리고 네 신물의 주인과의 만남까지 복합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풀어갑니다.
태왕사신기의 매력 포인트는 배우에 있습니다.
드라마 시작부터 4회까지 배우들이 맹활약하죠. 제가 언급하는 건 아역 배우들입니다. 굳이 아역이라는 수식어가 필요없을 정도로 성인에 버금가는 감정 표현을 하죠. 오히려 성인의 과잉된 표현보다는 아역들의 다소 미숙하고 절제된(?) 표현이 더 적절할 때가 있다는 생각에섭니다. 개인적인 취향에 따른 것이겠지만 전 다시보기를 즐기시는 시청자라면 4회까지를 집중해서 재방 하시길 추천합니다.
배우들의 연기력이 뛰어납니다. 유승호(담덕 역)와 박은빈(기하 역), 심은경(수지니 역), 김호영(연호개 역) 등이 10년이 지난 지금 성인이 되어 영화나 드라마, 뮤지컬에서 주인공을 맡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새싹일 때부터 남달랐다는 의미겠죠?
무엇보다 유승호의 담덕 연기는 최고라 할 수 있습니다. (살짝 사심 반영)
유승호는 요즘 MBC드라마 '로봇이 아니야'에서 주연으로 활약하고 있죠. 제가 보기엔 태왕사신기 연기가 유승호의 최고 연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고뇌에 찬 왕자, 허약한 듯 보이면서도 영리하고 현명한 왕자의 모습을 하고 있죠.
왕자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게 허세 없는 연기가 보기 좋습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멍청하고 아는 것 없는 왕자의 모습으로 타인들을 속이고 있다는 극 중 설정 때문이겠지만 기름기를 쫙 뺀 그야말로 담백한 연기입니다. 두 눈 속에는 나이 어린 왕자가 권력에 욕심내는 성인들과 싸우며 갖는 두려움이 가득하지만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항상 바쁘게 움직이죠.
연기력을 볼 수 있는 장면은 3회 말미에 등장합니다. 자신의 아버지 고국양왕(독고영재)을 죽이려 했던 고모 연부인(김선경)에게 독약을 건네며 하는 말입니다. 정적이라 할 수 있는 연호개를 적이 아닌 친구라 생각하며 그를 아끼는 마음이 드러나는 대사죠. 단호하고 강한 어조로 하고자 하는 말을 전하는 담덕의 모습은 어리지만 성숙한 어른의 향기가 뭍어납니다.
* 태왕사신기 3회(해당 장면은 47분쯤 나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FaTpOVHll4
담덕 "고모님 이게 뭔지 아십니까? 이 안엔 독약이 들어있는데요. 매일 한방울씩 마시게 하면 아무도 그 원인을 모르게 한달, 늦어도 석달 안에 독살할 수 있답니다.(중략) 어의가 자백했습니다. 호개가 약을 주며 시켰다고요."
연부인(김선경) "그리도 어리고 순진한 얼굴로 도대체..."
담덕 "호개가 아니면 누구지요? 누가 연씨집 가문에 내린 금덩이를 써서 임금님을 헤치려 했을까요? 어찌 생각하세요?"
연부인 "감히, 감히 고모라 부르지 마. 더러운 종자가, 감히 한피를 가졌다고 부르지 마."
담덕 "그 자 하나만 잡아주세요. 저도 호개가 다치는 게 싫습니다. (눈빛 맞춘 뒤 간단히 목례)누군가 어의를 매수해서 임금님을 헤치려 했습니다. 그 자 하나만 잡을 수 있다면 연씨 집안 다른 이들에겐 다신 죄를 묻는 일이 없을 겁니다. 추모대왕님 앞에 약속합니다."
담덕은 독약 혐의를 부인하는 고모의 외침에 어의의 잘린 목을 상자에서 꺼내듭니다.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극 중이긴 하지만 어른보다도 여러 수를 내다보고 주변 인물들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상황을 종료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한거죠. 유승호는 그렇게 영화 '집으로'의 귀여운 꼬마아이는 사라진 채 고뇌에 찬 왕자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박은빈과의 케미도 돋보입니다. 박은빈은 표정 연기가 많지 않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악의 핵심인 화천회에서 자라난 기하가 다양한 표정을 짓기란 쉽지 않은 일이죠. 그래서일까요, 웃는 표정은 흔치 않습니다. 하지만 기하 역에 딱 맞게, 과하지도 모자르지도 않게 적절한 톤으로 연기합니다. 자연스럽죠.
수니지 역을 맡은 심은경은 그때부터 끼를 감출 수 없었던 듯 합니다. 영화 '써니'나 '수상한 그녀'에서 보였던 그 모습을 태왕사신기에서 먼저 선보였죠. 수지니라는 역할이 아이 때부터 길거리와 장터를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고 넉살 부리기로 유명한 역할인 만큼 심은경의 밝은 연기가 적합합니다.
태왕사신기는 방영 당시 배우들의 연기력 논란이 거셌습니다. 특히 성인 연기자들에 대해 이같은 논란이 일었죠. 역할에 맞지 않는 캐스팅이란 의견이 대부분이었죠. 연기 평가는 개인적인 주관이니까요. 보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오랜만에 판타지물을 다시 한번 보고 눈요깃거리를 즐기면서 연기에 대한 평가를 해보는 것도 즐거울 듯 합니다.
* iMBC 태왕사신기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