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 다시 쓰기
글/그림 - 진이
원작 - 안데르센 <성냥팔이 소녀>
1. 감자팔이 소녀
"감자 사세요, 맛있는 동글동글 감자 사세요."
어느 추운 겨울날, 감자팔이 소녀는 시장 근처 골목길에서 감자를 팔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추위에 얼어버린 입을 간신히 움직였지만, 사람들에게 소녀의 외침은 닿지 않는 듯했습니다.
"감자 사세요..."
소녀는 작게 외치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새까만 잉크를 쏟은 종이처럼 어둡고 차가운 하늘에서는 진눈깨비가 나풀나풀 내리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그 풍경에 잠시 넋을 놓았다가, 이내 얇은 옷가지를 뚫고 들어오는 무시무시한 찬바람에 몸을 웅크리고 떨었습니다. 다시 고개를 든 소녀의 눈앞에는 까만 정장 코트를 입고 바삐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과, 불이 다 꺼져가는 간이 화로, 그리고 감자 한 바구니가 있었습니다.
"이걸 다 팔지 못하면 학교에 갈 수 없어..."
소녀는 차가운 볼을 두 손으로 마구 비빈 뒤, 마음을 굳게 먹은 듯 한 번 더 크게 외쳤습니다.
"감자 사세요! 맛있고 따끈따끈한 감자 사세요."
소녀의 힘찬 목소리에 몇몇 행인의 시선이 잠시 소녀가 있는 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곧 그들은 딱하다는 듯 두어 번 고개를 젓고는 가로등 뒤편으로 사라졌습니다. 소녀는 몸도, 마음도 너무 시렸지만, 꼭 감자를 다 팔기 위해 추위를 버텨야 했습니다.
굳은 몸을 조금씩 움직이던 소녀는 감자 바구니 밑에서 꼬깃꼬깃하게 적힌 종이 한 장을 꺼내었습니다.
'데이지 기숙학교 학생 모집. 학생들이 즐겁게 공부할 수 있는 곳. 일 년 등록금 ㅇㅇㅇ.'
소녀는 잠시 동안 종이를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소중히 접은 종이를 바구니에 다시 돌려놓기 위해 몸을 숙였습니다.
"앗, 차가워!"
눈송이 하나가 그새 소녀의 목도리 사이로 들어와 소녀의 맨살에 닿은 것입니다. 소녀는 차가운 목을 문지르면서 어느새 불이 꺼진 화로를 살펴보았습니다.
"성냥이 모두 눈에 젖어버렸네."
소녀는 바구니에 놓인 감자 하나를 집어 들어 손으로 눈을 툭툭, 털어내고는 작게 한 입을 베어 물었습니다.
2. 전쟁
감자팔이 소녀는 원래 화목한 가족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습니다. 소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집 근처의 적당한 텃밭을 성실히 일구어 살았습니다. 소녀의 가족은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소녀가 고작 3살이던 해에 소녀의 아버지는 나라로부터 전쟁에 참전하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소녀의 어머니는 눈물로 남편을 배웅했습니다.
"몸만 무사히 돌아오세요."
"나 없이도 우리 딸을 잘 키워주시오. 금방 돌아오겠소."
그렇게 소녀의 아버지를 비롯한 서른 명의 아들, 남편, 아버지들이 타지의 전쟁터로 떠났습니다.
남편이 떠난 후, 소녀의 어머니는 자라나는 소녀를 키우기 위해 어린 소녀를 데리고 시장에서 음식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시장은 한동안 떠나간 가족들을 걱정하는 한숨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혼자 소녀를 돌보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소녀의 어머니에게는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감자, 당근, 토마토 밭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감자팔이 소녀의 가족은 살아갔습니다. 전쟁은 삼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 소녀가 여섯 살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똑똑똑. "계십니까?"
까만 양복을 입은 두 사람이 문을 두드렸습니다. 소녀의 어머니는 낯선 이들에게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어떤 일로 오셨나요?"
낯선 이는 본인이 나라에서 왔다고 이야기하며 얇은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어머니에게 전달했습니다.
"이곳에 서명을 부탁드립니다."
"무엇을 위한 서명인가요?"
"전쟁으로 타지에 있는 우리 군대에게 식량 보급이 어려워 나라의 농장들과 밭에서 나는 식량들을 모두 군수 식량 보급처로 지정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오늘 이 시간부로 이 마을에 있는 모든 개인 소유 농장들은 나라를 위해 식량을 보급할 의무가 있습니다."
양복을 입은 사람들은 여섯 살 소녀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어머니의 서명을 받고 작은 돈 몇 푼을 봉투에 담아준 뒤 또 다른 집으로 떠났습니다.
곧 마을의 모든 농장들에 울타리가 쳐지고, 밭에서 나는 모든 곡식들이 커다란 군수 차량에 싣겨 나가는 모습을 보며 마을 사람들은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대대로 일구어 온 밭 봉투에 든 동전 몇 닢과, 삐뚤어진 서명으로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가난이 많은 사람들을 덮치기 시작했습니다. 소녀의 어머니는 집 뒤편에 자라는 작은 감자 몇 알을 캐서 시장에 팔았습니다. 하지만 가난이 사람들의 마음에 나쁜 싹을 틔워 소녀의 가족은 시장 한편의 자리조차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듬해 봄, 전쟁이 종식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녀의 가난은 그대로였습니다. 소녀의 아버지를 비롯한 대부분의 청년들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마을이 점차 커지고 새 건물들이 세워지는 동안 소녀의 가족은 계속해서 감자를 팔았습니다.
소녀는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었습니다.
3. 감자팔이 소녀의 꿈
감자팔이 소녀는 감자 하나를 다 먹고 남은 감자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어차피 오늘 다 팔지 못하면 싹이 나고 말겠지."
소녀는 화로와 무거운 바구니를 들고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오랫동안 언 땅바닥에 앉아있던 탓인지 다리가 잘 펴지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어두운 골목길을 한 발, 한 발 걸어갔습니다.
"왈왈!"
"오늘도 이 자리에 있구나."
소녀가 쭈그려 앉자 떠돌이 갈색 개가 소녀에게 다가왔습니다. 소녀는 바구니에서 감자 하나를 집어 개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개는 감사의 표시로 소녀의 옆에 앉아 소녀의 언 다리를 조금이나마 자신의 온기로 녹여주었습니다.
"고마워. 나는 이제 가볼게."
다시 골목골목을 지나던 소녀는 담장 밑에서 부둥켜 앉고 있는 두 작은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왜 집에 안 가 있고 여기에 앉아 있니?"
"언니!"
"너무 배고파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어."
"어차피 집에 있어도 추운 걸." 남자아이가 말하자 옆의 여자아이가 거들었습니다.
"너희 어머니께서 걱정하시겠다."
"우리 엄마는 지금 언니 엄마를 간호하고 계셔. 따뜻한 거랑 고기를 먹어야 나으신댔어."
감자팔이 소녀는 아이들을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바구니의 감자를 두 개씩 주었다.
"배고프겠다. 어서 먹어."
"고마워 누나. 이따 누나 집에서 보자."
"언니 안녕."
아이들은 감자를 열심히 베어 먹으며 동쪽 샛길로 걸어갔습니다. 아이들이 시야에 보이지 않자 소녀는 가벼워진 바구니를 들고 아이들이 앉아있던 담장 뒤의 낡고 허물어진 집에 다가갔습니다.
똑똑. "할아버지, 저 왔어요."
소녀가 문을 두드리자 집 안에서 무뚝뚝한 인상의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나와 소녀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소녀의 바구니를 힐끗 보더니 말했습니다. "오늘도 감자가 꽤 남았구나. 어서 들어오너라."
할아버지의 집 안은 좁고 낡았지만 아늑했습니다. 작은 화로에는 조그맣게 따뜻한 불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을 피하며 익숙한 듯 집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할아버지, 감자 조금 드세요." 소녀는 감자 바구니를 자그마한 나무 식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자, 어제는 어디까지 했지? 보자, 문장의 형식까지 했었구나." 할아버지가 감자를 집어 들며 말했습니다.
"외우라고 하신 단어들도 다 외워왔어요. 글쓰기 숙제도 다 했고요."
할아버지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선생님이었습니다. 엄격하지만 정이 많은 할아버지는 가난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소녀가 늘 안쓰러워 소녀가 감자를 팔고 돌아오면 조금이나마 자신의 지식을 나누어 주고자 한 것입니다.
소녀는 이를 알고 혼자 계신 할아버지에게 자주 음식을 가져다 드리며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무언가를 가르쳐주면 성실히 노력해서 배우는 소녀가 기특했습니다.
"다 풀었어요, 할아버지."
"그래, 보자꾸나." 할아버지는 책상 위에 놓인 돋보기를 끼고 소녀의 낡은 공책에 적힌 글씨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만 이렇게 고치면 되겠구나. 잘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어서 집에 가려무나."
"감사해요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세요."
창밖의 달이 지붕 위에 걸릴 때쯤 감자팔이 소녀는 집을 향해 나섰습니다. 소녀는 춥고 피곤했지만 마음속의 작은 불꽃이 계속해서 씩씩하게 걸어갈 기운을 주었습니다. 잠을 줄이며 할아버지께 배운 지식들은 결국 소녀가 꿈을 이루는 데에 큰 도움이 되어줄 것이었습니다.
'꼭 나와 같은 아이들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될 거야. 아이들이 더 이상 배를 곯지 않게...'
소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소녀는 텅 빈 바구니를 들고 오직 달빛만이 비추는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갔습니다.
걸어가는 소녀의 등 뒤로 눈 쌓인 소나무가 빛났습니다.
어렸을 때, 처음으로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를 읽고, 소녀의 안타까운 운명에 슬퍼했던 기억이 납니다. 할머니의 따뜻한 품속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 성냥팔이 소녀에게는 '해피 엔딩'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소녀가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이 재창작 소설은 '성냥팔이 소녀가 조금 더 주체적인 인생을 살았다면 어땠을까'라는 저의 상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성냥 대신 감자인 이유는,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다면 성냥보다는 겨울 먹거리를 파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성냥팔이 소녀가 쓰였을 당시에는 성냥이 가정 필수품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냥의 제조 과정에서 독성 물질에 그대로 노출된 어린아이들이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런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면 성냥팔이 소녀의 죽음에는 아이들을 보호해주지 못한 사회의 책임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이야기에서는 전쟁이라는 요소로 나타나는 부분이지요. 어른들의 싸움과 잘못으로 인해 교육의 기회와 삶의 질을 빼앗긴 아이들의 현실을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떠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감자팔이 소녀의 이야기가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매력적으로 다가갔다면 좋겠습니다. 또한 이 글을 통해 다양한 상황과 환경에서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분들께 위로와 용기를 전합니다.
브런치 작가와 함께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 성냥팔이 소녀
제13회 공유저작물 창작공모전 2차 참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