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1월, 친구 혜진이네 집에 초대되어 아이 둘을 데리고 갔더랬다
혜진이의 아이와 우리 집 첫째 아이의 나이가 여덟살로 같고, 몇 달 전, 함께 필리핀에서 열흘간 같이 지냈기에 둘은 만나자마자 보드게임을 하며 깔깔거리고 지냈다. 엄마인 우리 둘은 흐뭇하게 그 모습을 보며, 우리끼리 커피 타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감격했다.
혜진이는 막 이사를 해서 정신이 없었을테고 부천에서 을지로까지 직장도 다니건만, 우리가 간다고 식사부터 과일, 과자, 음료수 등을 정성스럽게 준비해 주었다. 식사를 마치자 아이들은 신기하게도 거실로, 안방으로, 작은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자기만의 세계에 빠졌고 혜진이는 딸기를 씻어 각각의 그릇에 담아 아이들 옆에 놓아 주었다.
이 때 우리집 첫째(막 8세 되신 분)가 부엌으로 뛰어와 말했다. "엄마, 딸기에 풀이 있어!"
곧이어 방에 엎드려 인형을 가지고 놀던 둘째(막 5세 되신 분)가 뛰어나왔다. "엄마, 딸기에 풀이 있어!"
이 사태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남편이 시작이었다.
한참 이휘재씨의 쌍둥이 아이 서언이 서준이가 <슈퍼맨이 돌아왔다>라는 프로로 티비에 나올 무렵, 동갑인 우리 첫째 아이를 보며 걱정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계곡 옆에서 백숙 다리 한 쪽씩을 뜯는 아이를 보며 흐뭇하게 웃던 이휘재씨. 알지알지, 기특한 그 마음.
반면 우리집 아이는 닭다리에서 살을 발라내 주는데도 크면 뱉어내었다. 그러면 나는 살을 잘게 찢어 숟가락에 밥과 함께 얹어줬고 시간이 지나며 아이는 그렇게 해줘야만 밥을 먹었다.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 것만으로도 예뻤지만, 이제 커가면서 이 아이도 닭다리를 들고 뜯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거였다.
남편은 무덤덤하고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부탁하지 않으면 자기 일의 범주가 아니라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런 남편이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싱크대 앞에 서는 시간은 아이들의 딸기를 씻을 때다. 씻는데서 끝나지 않고 꼭지를 떼고 반으로 갈라 접시에 담아 내놓는다. 늘 그렇다 보니, 아이들은 '풀'달린 딸기가 생소하다.
이게 과연 아이를 위한 일일까를 생각하다, 십년전쯤 동생과 나눈 이야기가 생각났다. 동생은 대학원 사람들과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고 했다. 그 때, 생선 구이를 먹던 친구 한 명이 "우리 엄마랑 먹으면 엄마가 생선 살 다 발라주는데." 라기에, 동생이 "나도 그래." 라고 말했다고.
스무살이 훌쩍 넘어 직장인이 되어도, 엄마가 발라주는 생선 살은 사랑이다.
부모님은 퇴직을 하시고 시골에 들어가 꿈에 그리던 전원주택을 지으셨다. 공기도 좋고 풍경도 좋은 시골집의 단점은 차편이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청주로 가서 거기서 미원면으로 가는 버스를 다시 타고 한시간 가량을 가면 미원 읍내이다. 읍내에 내릴 때쯤에 맞춰 부모님이 차로 십 분 가량 나오셔서 거기서 간단히 장을 보고 나를 태워 집으로 가셨다. 그 곳이 집에서 가장 가까운 뭔가를 살 수 있는 곳이었다.
집에서 배 두드리며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놀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면 어떻게든 엄마 집에 더 머무르고 싶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미원 정류장으로 가면 그 곳이 종점이어서 버스는 한참 그 곳에 서 있었다. 시동만 걸린 채 기사님이 안계신 그 버스가 언제 출발할 지는 몰랐지만, 이 버스가 떠나면 그 다음 버스가 언제 올 지 모른다는 건 확실히 알았다.
번화가라 부르기에 작은 읍내에도, 주차할 곳은 늘 마땅치가 않아 정류장에서 좀 멀리 주차하고 엄마와 팔짱을 끼고 버스까지 와서 뒤를 돌아보니 아빠가 안계셨다. 어, 아빠가 어디 가셨지? 하며 두리번거리다가 빈 버스에 올라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엄마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빠가 저 멀리서부터 손에 봉다리 하나를 들고 전력질주 하고 계셨다.
"어휴, 다행이다. 못 줄까봐 걱정했네." 하면서 아빠가 내민 것은 내가 좋아하는, 흰 앙금이 가득 든 타원형의 생도너츠였다. 딸래미 가는 길에 좋아하는 것 사주려고, 오던 길에 빵집에 들러 급히 산 빵이 든 비닐봉지.
아빠는 내가 크는 내내 회사 일로 바쁜 분이었고 무서웠다. 그건 어쩌면 너무 힘들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저 그 표현법이 참 힘들었다. 나이가 들며 아빠도 나도, 뾰족한 부분이 부서져 나가고 웃으며 마주보게 되었지만, 그래도 저 깊은 나는 여전히 어려운 분으로 남아있었나보다.
점잖고 신사같은 아빠가 비닐 봉다리를 들고 뛰던 모습은 그래서, 돌아볼 때마다 눈물이 난다.
아빠도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구나.
아빠도 표현하지 못했을 뿐, 나를 향한 진한 사랑이 있었구나.
그런 생각에 그 날 그 순간은 깊은 위로가 되었다.
여덟 살에 딸기 꼭다리도 못 따먹는 아이지만, 그건 오랫동안 아빠가 날 사랑했다는 기억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본다. 그래서, "그냥 씻어서 줘보자. 이제 그 나이면 딸기 꼭지는 정리하며 먹을 줄 알아야지." 라는 내 말에, "언젠가 다 하게 돼. 지금은 이렇게 주고 싶어."라는 남편을 애써 말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