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내가 확실히 아는 것들 by 진희

by 플로우지니


진득하게 잘 못하는 것은 연애 뿐이 아니었다.

모든 흐름은 내 삶과 일맥상통한다.


대학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떨어지면서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첫 연애는 마치 미저리와 같았는데 들러 붙는 쪽은 나였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미친 여자처럼 밤낮 없이 남자 친구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쉴새없이 전화하고 문자하고 보고싶다고 징징댔다. 그리고 한달 반만에 펑펑 울며 차이고 말았다.


그 충격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세상 쿨한 여자로 만들었는데, 아마도 헤어짐을 잘 받아들이는 법을 알게 된 것 같다.


그 후로는, 남자친구는 꾸준히 있었지만 백 일을 넘긴 적이 없다시피 한데, 나의 스타일은 이러했다. 호감이 생긴다. 별 고민없이 사귄다. 사귀면 앞도 뒤도 없이 빠져든다. 마치 '사랑과 정열을 그대에게'라는 문구처럼. 진짜 잘해주었을 때 남자의 행동 중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어떤 부분인 것이다. 두 번쯤 '그 행동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데 여전히 그 행동을 한다면, 그만 만나기로 한다. 그게 보통 사귀고 백일도 안되어서다.


아니, 너무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것 아니야?라며 충고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차피 끝까지 이어질 수 없다면 헤어질 수 없어 만나느니 지금 끝내는 게 서로의 시간과 노력을 아끼는 길이 아닐까. 쿨하게 헤어질 수 있는 건, 나 나름대로 그 사람에게 진심을 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련이 없어서.


작은 거절도 못하던 내가 어떻게 헤어지자는 말은 매번 할 수 있었을까 돌아본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보다 저 사람과 한 시라도 그만 보고 싶은 욕구가 컸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연애에서 끝나지 않고 직장 생활로도 이어졌다. 지금이야 몸값을 높이려 이직하는 일이 흔해졌지만,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한 곳에 오래 다닐 수 있다면 버티는 것이 미덕이었다.

애시당초 처음 들어간 회사부터 대기업이 아니었던 데다가, 직종도 인테리어다 보니 노동의 강도는 높았고 월급은 형편없었다. 사장님의 처우에 화가 난 직원들은 내가 입사하고 3개월만에 화가 나서 엿먹이자는 마음으로 다같이 퇴사를 했다.

그 후에 들어간 회사는 이주일만에, 그 다음의 어떤 회사는 이틀만에 그만두기도 했다. 취업은 잘 되었지만 오래 다니지 못하는 횟수가 늘어갔다. 그 때도 뭐, 다른 회사에 또 들어가면 되지. 하고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런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싶으면서도, 그게 나라는 사람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청담동에서 인테리어 사업을 하겠다'는 것은 대학때부터 가졌던 숙원사업이었다. 그 바램이 송곳처럼 뾰족하게 오랫동안 유지되자, 일을 해본지 2년도 안 된 신입이던 어느날 청담동에 회사를 차려버렸다. 같이 일하던 시공팀장님과 함께.


시공팀장님 나이가 많고 나는 20대 중반에 불과했기에, 마침 대기업 퇴직한 아버지에게 회사에 와서 자리를 지켜달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가 사무실을 얻어 주셨고 작업용 차를 사주셨다.

시공팀장님이 이것저것 더 요구했다. 회사는 차렸고, 이제 자기 없이는 이 회사가 돌아가지 않을거라고 생각하셨는지 더 사달라는 것이 늘어났다. 이대로라면 계속 끌려다닐 것이 뻔하고 이 분이 안계시면 당장 수주를 한다해도 어떻게 공사할 것인가. 하지만, 끌려다닐 수 없었다. 창업하자마자 그 분을 잘라냈다.


잡코리아에 모집 공고를 냈다. 그리고 첫 날, 면접을 보러 오신 분은 내가 2주만 일하고 그만뒀던 회사의 팀장님이셨다. 얼굴을 아는 분이라 반가웠고, 그 분도 흔쾌히 자신이 이 일을 꼭 하고 싶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청담동 부동산에 부지런히 명함을 돌렸고 팀장님과 함께 고객 상담을 하고 재료를 보러 다녔다. 아버지도 나도, 일을 배우는 입장이었고 같이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청담동 아파트 공사가 시작되던 날, 우리는 팀장님이 말하는 공사 원가가 실제 원가보다 현저히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잘 모르면 이렇게 댓가가 크다. 우리는 결정했다. 공사가 시작된 직후, 우리는 두 번째 직원인 팀장님과 결별했다.


공사 기간은 정해져 있고 막막하던 이 때에, 고민을 상담했더니 도움을 주신 분은 단 3개월만에 그만뒀던 첫 회사의 실장님이셨다. 실장님은 믿을만한 시공회사를 소개해 주셨다. 큰 돈이 오갔지만 실장님이 뒤에 버티고 계셨기에 언제라도 모르는 것을 물어봐가며, 베테랑의 돈놀이에 휘말리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좌충우돌 사업이 진행되었고, 2년 반만에 실장님이 심장 수술을 하다가 돌아가시며 우리도 급히 회사를 접었다.


이 모든 과정이 '사업'할 때를 대비한 인연들이었을까. 무리한 것을 요구한 팀장님이었지만, 그가 아니었으면 창업할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그는 창업을 하도록 도우려고 나타났다.

2주만에 그만두었더라도, 그 회사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사적인 욕심 때문에) 의욕적이었던 팀장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청담동 공사를 수주할 수 없었을 것이다.

3개월간 산전수전을 다 경험했던 첫 회사에 가지 않았다면, 유능한 시공팀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왜 여기에 와있지, 싶은 모든 순간은 그 다음으로 가기 위한 인연이 도사리고 있었다. 정말 마음맞는 친구를 만날 수도 있었고, 이건 아니다 싶으면 끊어낼 용기를 배웠다.


대기업에 다니며 돈 많이 버는건 어떤걸까. 그런 회사에 내 평생 발 담궈볼 일은 없겠지.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 큰 것을 쥐고 있으면 놓기가 힘들었겠지. 어쩌면 그래서 대기업에 들어가지 못한건, 내겐 행운인 일이다. 나는 내가 뚜벅뚜벅 잘 걸었음을 칭찬해 주고 싶다. 헤어질 때를 알고 가차없이 헤어질 용기. 다음 걸음을 다시 내디딜 용기. 그것은 내 인생의 흐름이었다. 마음에 충실한 삶은 나를 그렇게 다음 회사로, 수학교사로, 작가로, 예술가로 연결시켰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마음을 나눌 친구들을 각계각층에서 만났다.


돌아보면, 인생의 어떤 거지같은 순간도! 결국 행운의 씨앗이었다. 인연이란, 그렇게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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