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 아파트 화단에 동백꽃 나무가 한 그루 있다. 많은 나무들 중 한 그루지만 빨간 꽃이 완전히 눈길을 사로잡아, 그 옆에 있는 나무가 뭔지 잊게 한다. 진하고 힘있는 잎 사이에서도 자신을 독보적으로 내세우는 동백꽃.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감탄한다. 더 놀라운 것은, 꽃이 떨어지는 모양이다. 생기가 아직도 가득한 채로, 흐트러지지 않고 한 송이 그대로 바닥에 똑 떨어져, 보도블럭까지 꽃의 일부로 만들어버린다. 화려하고 우아하고 깔끔하기까지! 올 때부터 떠날 때까지 여왕같구나.
사실, 꽃을 이렇게 관찰하며 보게 된 것은 그림을 그리면서부터이다.
처음에 수채화 초급 책을 구입했다. 그리고 첫 장의 장미 꽃잎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따라 그렸다. 장미꽃 하나를 그리려고 보니, 잎은 붉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분홍에서 시작해, 어떤 부분은 검붉기도, 또 어떤 부분은 물을 많이 타서 투명에 가까운 흰색이었다가, 꽃잎들이 모이는 부분에는 노란 색이 된다. 그 얇디 얇은 잎에도 아주 미세하게 꽃잎맥이 있어, 세필붓을 살짝 들어 힘을 뺀 후 살살 얇은 선을 그어주면 꽃의 한 잎이 완성되었다.
그 다음에 그린 것은 단풍잎이였다.
단풍잎이 어떻게 생긴지 주의깊게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잎이 몇갈래인지 들여다 보았다. 잎의 모양을 잡고 잎맥이 어디서부터 시작해 어떻게 끝나는지 처음 보게 되었다. 주의깊게 책의 단풍잎 그림을 보며 하나를 그리고 나니, 바닥에 굴러다니는 수북한 단풍잎이 달리 보였다. 마치 사람처럼, 잎이 생긴 모양이 모두 제각각이며 잎의 손가락 사이즈가 다 다르고 색깔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초록색에서 짠! 하고 빨간색이 되는 게 아니라, 잎의 어느 부분부터 약간씩 붉게 변해가는지를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가을이면 늘 보던 것이었지만, 마치 단풍잎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림을 그리려면, 그 사물을 또렷이 관찰해야 했다. 그리고, 잎의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 그려낼 건지, 생략할 것인지를 판단했다. 풍경을 그릴 때에, 매일 가던 가게에 어닝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 인지하게 되었고, 가게로 올라가는 계단의 갯수, 각도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파란 하늘을 보는 날에도, 어떤 파란 색인지. 청명하고 높은 하늘인지, 얕은 하늘인지. 구름이 어떤 모양인지 노을이 지면 마알간 노란빛에서 파란빛까지 어떻게 보이는지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관찰하는 순간에는 과거나 미래를 가져올 수가 없다. 그저, 지금 이 순간, 그것이 생긴 모양에 온 신경을 집중할 뿐, 바로 전에 어땠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해서는, 이 순간을 도화지에 옮길 수가 없다. 지금 이 찰나, 이 순간만을 보아야 그 장면을 색으로 표현할 수 있다.
작년 가을, 같은 동네에 살던 동네 친구가 필리핀으로 이사를 했고, 그녀를 보러 아이들과 필리핀에 갔었다. 우리는 매일같이 만나서 그림을 그렸다. 오랜 기간 그림 그리는 게 꿈이었다는 친구가, 첫 리스그림을 그리며 설레어하던 표정을, 완성된 그림을 들고 감격하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친구는 그 순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된 것 같았고, 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기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에 마음 어딘가가 건드려져, 그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찡하고 눈물이 난다.
그 친구 남편분은 바쁘신 와중에도 일부러 시간을 내,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동산으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주셨다. 친구 가족과 종일 놀고 집에 가는 시간, 해가 뉘엇뉘엇 지고 있었다. 사실, 해가 진다고 하기에는 산에 걸쳐진 것이 아닌, 하늘에 동그랗게 떠있는 모양이었지만, 파란 하늘 속의 그 해는 눈이 부시게 빛났고 바로 그 주위가 빨갛게, 그 주위는 오렌지빛으로 넓게 둘러져 비현실적인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남편분이 친구에게 건네준 썬글라스를 눈 앞에 갖다 대고 정면으로 바라본 그 시간의 태양과 함께, 그 태양을 보던 시간, 봉고 속에 어떤 자리에 앉아 있었는지, 친구와 앞뒤로 앉아 어떤 자세로 이야기했는지, 봉고 안의 공기(무드)가 어땠는지가, 내 시선인 채로 고스란히 장면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동그랗던 해는 순식간에, 산 뒤로 넘어갔다.
그 친구가 나중에 내게 말했다.
"언니, 나는 언니가 해를 보면서 말할 때, 같이 해를 보는데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오늘 저녁 뭐먹지?'
언니가 하늘 색에 대해서 말할 때, 해 모양이 어떻다고 말할 때, 처음으로 그 모양을 보게 되었어."
신기하게도, 그 말은 내 스스로를 돌아보게 했다. 그리고 나서야, 내가 사물을 그렇게 보도록, 그림 그리면서 관점이 완전히 바뀌어 있구나를 인지하게 되었다.
내가 그림을 그리며 찰나의 장면을 느끼는 것처럼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찰나의 감정을 잘 느끼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별 생각 없이 넘길 어떤 장면을 세세하고 풍부하게 느끼고, 그 느낌을 말해주어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친구. 이렇게 소중한 재능이라니!
그림을 그리면서 지금 이 순간에 조금 가까워진 지금이 참 좋다.
흐드러지게 핀 봄꽃들을, 오늘도 눈으로 찍어 내 안에 저장해본다.
그 꽃들 안에서 웃는 아이들의 얼굴, 피부의 감촉, 걷는 모양, 공기, 하늘.
오늘이 가면 없을 오늘의 순간을 온전히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