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질인생은 옳다.

취미 2 by 진희

by 플로우지니




내 취미이자 특기는, 일단 저지르는 것이다.
그거, 하고 싶은데?라고 생각하면 다음날 이미 학원이나 과정에 등록한 상태이다.

그림을 그린 지 1년쯤 되었을 때, 친구 서은이와 오랜만에 만났다. 어떻게 그림을 그렇게 그리게 되었냐며 자기도 어릴 적에 그림을 참 좋아했다고 했다. 서은이는 고등학교 친구인데, 손재주가 좋다. 친구는 크리스마스마다 직접 만든 카드에 손글씨를 써서 수십 명 친구들에게 선물했다.


여고생들이 늘 하는 것이 쪽지를 적어 주고받는 것이었다지만, 종이를 자르고 붙여 만든 카드를 받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이 것 하나를 만드는 데 얼마나 큰 노력이 들어갔을까. 그걸 수십 통 만든 후 일일이 의미를 담은 글을 담아 선물한다는 것이 참 고맙기도 하고 대단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건 이 친구의 특기이기도 했지만 즐거움이기도 했다. 그래서인가, 친구는 유아교육과를 나와 유치원 선생님이 되었다. 놀랍게도, 행보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졸업하고 어머니와 유치원을 설립하기까지 했던 친구는, 몇 년 후 모든 걸 정리하고 교육대학교에 입학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부산에서 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이렇게 험한 길을 뚫은 거침없는 친구는 시험관으로 아이 셋을 낳고 휴직기간이었던 동안 그림을 그리러 가보기도 하고, 자수도, 뜨개질도 해보았다고 했다. 하지만,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곤 했다며, '과연 이걸 끝까지 해서 직업으로 만들 수 있을까. 이게 나중에 내 삶에 실질적 도움이 될까' 하는 고민 때문에 지속하지 못했다고 했다.







취미라는 말에는 가벼움의 느낌이 있다. 그게 본업인 건 아니니까,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가뿐함. 마음이 그렇다는 거지 취미라는 이름 붙은 것에 드는 돈까지 가뿐하지는 않다.



재즈댄스를 배워볼까? 수업을 신청해보자. 수업료를 내고 수업에 참가하면 첫 시간에 다 같이 재즈화(신발)를 대량 구입 신청한다.
재봉틀을 배워볼까? 직선 박기만 할 수 있어도 만들고 싶은 것이 생긴다. 어쩜 도안 하나로 간단한 가방만 만들어도 수십 가지 무늬가 예뻐 보인다. 나중에 만들 스커트 천도 본 김에 삽시다. 불과 한 달 만에 집에 천 정리대가 필요한 지경이 된다.
수영을 배워볼까? 등록을 하고 수영복과 수영모자와 수경을 산다.
요리! 준비해 갈 건 없다. 재료비가 비쌀 뿐. 하지만 그 재료, 집에는 없죠. 실습해보려고 수업 듣는 날마다 온갖 재료와 조미료를 구입한다. 한 끼에 십만 원이 넘었어! (호텔 식사를 할걸)
마라톤을 해보자. 마라톤용 신발, 스포츠브라 두 개와, 헐렁하면서 핏을 잘 살려줄 상의와 바지를 짧은 것과 긴 것 구비한다.
다 제 얘기입니다. 다 금방 그만뒀어요.(충격과 공포!)

여기서 끝이 아니다.

3년전, 수채화를 시작했을 때, 수강료는 한 달에 12만 원이었다. 수채화용 스케치북과 수채물감을 사 오라고 하셨다. 무려 10년 전, 중고로 사두었던 물감, 팔레트를 챙겨 갔다. 물감은 놀랍게도 10년이나 지났는데도 튜브 안에 새것처럼 굳지 않고 있었다. 돈 굳었다는 느낌적인 느낌!

수채화를 일주일에 한 번 배우는데서 나아가, 완성도를 높이고 싶어 좋은 재료를 써보고 싶었다. 선생님은 <아르쉬지>를 추천해 주셨는데, 아르쉬 20매 패드 한 권에 10만 원가량이었다. 종이 가격은 그림을 그릴 때 온 정성을 다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그림은 종이빨입니다, 여러분. 번짐이 좋고 물 머금는 시간이 길어, 나는 이 종이를 사랑했다.

<아르쉬지>는 거친 정도에 따라 황목, 중목, 세목으로 나뉜다. 황목이 이런 거구나 알았으니, 이번엔 중목과 세목을 사서 써보고 싶었다. 가격이 비싸니 작은 사이즈 종이를 사서 이것저것 그려보았다. 오오, 이런 느낌이군!


내가 쓰던 종이는 제곱미터당 300그람으로 다소 무거운 종이였는데, 가벼운 건 그림 퀄리티가 떨어질까? 궁금하니 사보았다.
그다음에는 이런 붓은 어떨까, 저런 붓은 어떨까.
그다음엔 이런 물감은 어떨까. 낱개로 브랜드별로 색깔을 추가하고, 펄 물감을 샀다.

돈은 계속 든다.
동시에, 이쯤 되면 그림 그리는 것은 신선한 도전이 된다. 새로운 종이마다 특성이 있고 새로운 물감마다 필요한 물 양이 있다. 그림은 제한된 주제에서 벗어나고 내가 가진 재료들로 표현하고 싶은 그림이 뭔지를 하루 종일 찾는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알게 된 놀라운 사실.
선생님은 세목지를 써본 적이 없었다. 선생님은 펄 물감을 본 적이 없었다. 20년간 그림을 가르쳤고 매번 학생들을 모조리 예고로 진학시키는 능력자였지만 동시에, 자기가 편하게 생각하는 영역 밖으로는 나와본 적이 없었으며, 그대로도 충분하다 여겨서인지 다른 물감이나 종이를 써볼 필요성을 못 느끼고 사셨다는 것이다.

잘 그리는 영역과 실험하는 영역이 별개이며, 나는 실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취미를 넘어서는 어떤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실험가가 되어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는 선생님의 추천으로는 알 수가 없다.
자신이 선호하는 아르쉬지의 재질은, 황목지만 써봐서는 알 수가 없다. 선생님은 그게 좋다고 하셨지만 나는 세목지도 좋았다. 써봐야 알 수 있다.
선생님은 사진과 똑같이 그리기를 잘하셨지만, 나는 삐뚤빼뚤한 선이 있는 그림이 좋았다.

내가 찾아낸 나의 길에 확신을 갖게 되자, 선생님의 평가가 내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상태, 내가 좋으면 된 상태가 되었다.





지금 나는, 레진 아트라는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선생님이 없어 헤매며 길을 찾는 내내, 온갖 재료를 사서 섞어보고 부어보고 붙여보는 실험을 했다.
작품이라기엔 계속 실험이라서, 비싼 재료비를 계속 들이부어야 하는 시간을 1년 넘게 보냈다. 남편이 주는 넉넉한 용돈의 90프로는 재료비로 쓰였다. 옷도 모임도 커피도 차순위였다.
그러면서 나는, 작품을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지금은 레진 작가이며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친구가 걱정한, 이게 돈이 될까 하는 고민을 이해한다. 이미 수채화 수업하는 사람이 넘치도록 많은데 내가 아무리 배운 들, 나중에 그걸로 돈을 벌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친구에게, 이제는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실험가가 되어보라고.

전문가이면, 늘 해오던 방식을 오히려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시작하는 사람이니까 그냥 시도를 해볼 수 있고 쌓이다 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기법이 이것이구나 깨닫는 순간이 온다고. 그게 너의 길이라고.







지나고 보면 돈을 참 많이도 썼다.
온갖 취미를 시작하고 그만두었다. 십 년 넘게 숱한 삽질을 한 것이다.

꾸준한 게 좋다는 사회의 암묵적 약속에, 스스로 위축될 때가 많았고 남편에게 종종 핀잔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삽질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알았겠는가.
춤을 잘 추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나도 잘 추고 싶다는 생각이 미련처럼 붙어 있었을 것이다. 세상 몸치인 것도 모르고.
반찬 몇 개를 만들 수 있게 되었지만 역시 요리는 재미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접영을 마치지 못했지만 깊은 물에서 튜브 없이 수영할 수 있게 되었으며, 다시는 안 할 거지만 예쁜 커튼을 만들어 쓸 수 있게 되었다. 마라톤이라는 취미를 즐기게 되었으며 너도 같이 뛰자고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숱한 삽질을 거쳐, 나이 먹어 가면서도 삽질은 계속될 것이며 그 과정이 늘 재미있을 것을 안다.

세상의 수많은 삽질러들이여
당신의 모든 삽질은 옳다.

수많은 삽질이 점처럼 이어진 어느 날, 그게 선이 되어 팝콘처럼 꽃처럼 피어날 것이다.

증거를 원하시면 저를 봐주시길.


황금사과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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