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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우지니 Jun 22. 2020

프롤로그

마흔에 어쩌다


다른 사람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은 나의 살갗과 같았다. 어려서는 '이걸 입고 싶다'라고 엄마를 조르지 않는 것으로, 자라서는 뭘 먹을까 묻는 상대에게 '네가 먹고 싶은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배려했다.


그것은 처음에는 배려였지만, 어느새 내 의사를 말하는 것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주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주장을 할 때면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나'에 대해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선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최대한 상대를 편하게 해 주기 위해.


그러는 긴긴 기간 동안, 나는 '착한 사람'으로 불렸다. 동시에, 내가 눌러 놓은 주장들은 가슴속에 응어리로 꼭꼭 쌓여갔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본능인 걸까. 얼마 전 탤런트 류승범이 화가 여자 친구와 결혼을 했다 기사를 보았다. 는 여자 친구가 그림 그리는 모습이 너무 예뻐 보여 느닷없이 "왜 그림을 그리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여자 친구는 "어릴 적 우리는 모두가 화가였어. 세상의 모든 어린이가 그림을 그리고 있잖아. 그 아름다운 취미를 당신은 멈췄고, 난 멈추지 않았을 뿐이야."라고 말했다고. 그 후 류승범은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그림을 멈추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 그림을 그만두었으니 20년도 넘게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한 때' 그림을 좋아했던 사람인 채로, 언젠가 다시 그리고 싶다는 미련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른여덟에 갑자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겨우겨우 발을 떼는 어린아이처럼 서투른 붓질을 시작했다. 다시 어릴 적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기대되었고, 내 재능이 그사이 모두 휘발되었을까 봐 두려웠다.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잘 그리고 싶었다.


두려움과 설렘의 마음으로, 나는 매일매일 그림을 그렸다. 어린아이 둘을 재워놓고 새벽에 일어나 그림을 그리노라면 어김없이 해 뜨는 시간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내가 되었다. 솔비가 티브이에서 '그림을 그리며 치유되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시간이 쌓이자 내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내가 화가가 되었음을 알았다.


비전공자라서 기본적으로 마음이 쫄아 붙었던 적이 있었다. 그림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기약 없는 시간을 헤쳐나가는지 알고 싶어 인터넷 서점에서 '그림', '에세이' 등의 조합으로 책을 찾아보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원하던 책은 찾지 못했다.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을 먼저 걸어간 누군가의 이야기를 너무나 듣고 싶었다.


몇 년간 그림을 그렸음에도, 나는 유명한 화가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나를 '화가'라고 소개한다. 내가 쌓아온 작업량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였고 그러는 동안 나도 모르게 나는 나를 알게 되었다. 좋아하는 색이 무엇인지, 어떤 것을 그리고 싶은지를 고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 '지금 당신과 먹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취향이라는 것은 그렇게 생겨났다. 남들이 좋아 보인다고 하는 것 말고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생기다니. 그것을 내 입으로 말하게 되다니. 그것들은 자신을 믿어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일들이었음을 그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배려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스스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며, 스스로를 잘 돌보게 되자 호구가 되지 않는 배려, 응어리 없이 기쁨 넘치는 배려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비전공자 화가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다. 예전과는 사뭇 다른 그림들이 인기를 얻는다. 유명해지지 않은 채로 좋아한다는 이유로 매일같이 그림을 그리며 보이지 않는 터널을 가고 있는 화가들에게, 나는 이런 길을 걸었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 당신이 느낀 것을 먼저 느낀 사람이 있었으며 나도, 당신도 경험을 겹겹이 쌓아 자신의 특별한 길을 만들어가고 있는 예술가라고, 같이 힘내자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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