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 있다. 임신은 수정과 착상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이 돼 자궁벽에 붙으면 바야흐로 임신이 시작된다고.
그건 착각이다. 당장 임신을 측정하는 지표부터 위와 같은 인식이 사실과 다르다는 걸 암시한다. 보통 임산한 사람에게 임신 N주차라는 숫자가 따라붙는다. 그렇다면 임신 0주차는 언제일까. 놀랍게도 임신 0주차는 배란도, 수정도, 착상도 아니다. 임신 0주차는 마지막 월경을 했을 때부터 집계한다. 그때부터 여포가 숙성해 난소를 비집고 나오기까지가 임신 2~3주차의 과정이다. 즉, 임신의 도입부는 예상보다 더 앞단에 놓여있다.
뜬금없이 임신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는 이유는, 최근 내가 처음 알게 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겐 간절히 바라는 일, 다른 누군가에겐 자연스러운 현상, 또다른 이에게는 '하지 않음'으로 결론이 난 그 일이 내 인생에도 끼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셋 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못 하고 방황하고 있다. 아이가 낳기 싫은 것도 아니지만 너무 낳고 싶은 것도 아닌, 그렇다고 알아서 임신을 하기도 어려운 교착상태에 빠져있다.
"다낭성이 약간 있는 것 같아요."
곧 20주년을 맞이할 월경불순을 교정해보고자 찾아간 산부인과에서는 나름의 진단을 내렸다. 다낭성 난소 증후군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상태로 보인다는 진맥이었다. 초음파로 보이는 내 장기에는 포도알 같은 여포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조그마한 난소 안에 그득히 쌓여있었다. 이걸 인위적으로 터트려서 밖으로 끄집어내는, 그 전에 이 녀석들이 여무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처방을 받았다. 치료 아닌 치료의 서막이었다.
그제야 임신 0주차의 의미를 이해했다. 난자부터 그냥, 거저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이 무럭무럭 자라 제때 경계를 깨트리고 나오도록 부차적으로 신경써야 할 게 많았다. 호르몬제를 복용하고, 필요하다면 주사도 맞아가면서 인위적인 노력이 들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즐겨 마시던 술은 끊는 게 좋고, 어쩌고저쩌고 영양제를 여러 알 챙겨 먹으면 금상첨화였다. 정성이 따로 없었다. 임신은 세포를 키우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나는 월경불순을 치료하는 그 과정에 적극적이지도, 그렇다고 소극적이지도 않았다. 십수년 간 달고 살았던 불규칙한 사이클을 한 번쯤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다면 더 바랄 바 없다는 마음이 컸다. 예측가능성을 높이는 차원이었다. 그럼에도 소위 "배란장애"를 고치는 여정에 쉽사리 마음을 붙이지 못 했다. 공을 들이니 그만큼의 진척이 있다는 걸 초음파로 보면서도, 그래서 신기하고 설레면서도 그 감정을 경계하게 됐다.
내가 아이를 원하나. 여전히 '아이가 갖고 싶다'는 주변 지인들에게 쉬이 공감하기 어려운 내게 임신을 위해 노력을 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은 애매하고 미묘하다. 미래에 내가 사랑할 무언가를 위해, 그에 대한 마음의 에너지를 가불해 지금 써야 하는 처지기 때문이다. 아직 사랑하고 나발이고 아무 감정이 들지 않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사건에 온 몸을 다해 뛰어들 준비가 됐는가. 각오의 순서가 뒤죽박죽이라는 게 혼란스러웠다.
무슨 생각이 이리 많아. 일단 부딪치고 보자.
20대 때와 달라진 30때의 마음가짐은 이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불확정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계획에 집착하는, 일종의 과도한 완벽주의에 사로잡히곤 하는 나도 세월이 흐르니 많이 유해졌다. 결과야 어떻든지 일단 해보자고, 설령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해봐야만 그 의미를 알 수 있다고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는 연습을 해왔다. 그래서 커리어가 들죽날죽 제멋대로지만(!?) 훨씬 유연하고 다채롭고 자유로운 삶의 태도를 얻었다.
그러나 임신에 관해서는 이 마인드셋을 작동시키기 쉽지 않았다. 남편이자 오랜 연인인 주형이에게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건 피봇팅이 불가능한 의사결정이야." 어떤 일이든 저질러놓고 수습하며 다음을 도모하는 게 가능하다고, 그렇게 해낼 수 있다고 스스로 경험해왔지만 임신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적어도 20~30년, 아니 내 여생에 영향을 미칠 변화였다. 어쨌든 '결심'이 필요한 것만은 확실했다.
더군다나 자연스레 목표(?)를 이룰 수 없다면 인공적으로 애를 써가야 하는데, 여기서부터 일이 복잡해졌다. 출산이라는 목표 설정이 내게 간절했던가. 지금이 적기니까, 나중에 기회가 없으니까 지금 저질러야 하나. 이 과업에 에너지를 지속해서, 이렇게까지 써야 하나. 근데 어쨌든 그 목표를 이루려면 최선을 다해야 함은 자명하고. 내가 그다지도 원하는지는 모르겠고. 기이한 쳇바퀴에서 결론을 내지 못 하고 갇히곤 했다.
별로 간절하고 싶지 않은 걸 수도.
임신, 출산, 아이라는 존재를 회피하지 말자고 생각을 바꾼 후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일을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임신 0주차에서 나아가는 노력을 지속가능하게 하려면 너무 간절해선 안 된다고 짐작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작디작은 세포가 커가는 찰나의 과정을 두 눈으로 확인하며 이 생각에 균열이 생겼다. 아, 이 일은 적당히 해선 이도저도 아닌 말짱도루묵이 되겠구나, 간절함을 피할 수 없구나 깨달았다.
간절함만은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20대를 통틀어 10년의 시간이 내게는 덜 간절해도 살 만한 합의점을 찾는, 타협의 연속이었다. 너무 기뻐하거나 기대하지 않고, 그렇지만 하루하루 적당히 먹고 살 만한 순간들로 채우면서 무사히 30대에 접어들었다. 간절함에 맞먹는 감정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늘 불가피한 실패와 나락을 예비해둔 채 살았다. 진짜 무릎이 꺾여 넘어졌을 때 너무 좌절하지 않을 채비를 해두는 식이었다.
무릎을 꺾고 빌어본 사람은 안다. 세상에는 불가항력이 존재한다는 걸. 내가 눈물 콧물 쏟아가며 빌고 매달려도 안 될 건 아니 된다는 걸. 그럼에도 삶은 지속되기에 어떻게든 잘 지내보려 용쓴다. 그러면서 체념을 학습하고 적응력을 키운다. 간절함을 멀리 한다. 어쩌다 보니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에 쓰디쓴 낙담을 하고 나니 내게는 일종의 '간절함 알러지'가 생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간절함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이다.
하나님. 우리 아빠 제발 살려주세요.
19살이었던 나는 바닥에 엎어진 채 울며 기도했다. 아빠가 췌장암 말기라는 걸 알게 된 이후였다. 그 소식을 접한 후 우리 가족의 최대 난제는 내 입시도, 언니의 향후 커리어도 아닌 아빠의 건강 회복이었다. 물론 차도는 좋지 않았다. 당시 의사는 길어도 6개월을 버티지 못 할 것이라 선고했다. 그래도 아빠가 1년 넘게 우리 곁을 지켰다는 걸 감사해야 했을까. 인생의 말로와 기막힌 사연을 담담히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바닥에 코를 박고 빌었지만 기도는 응답받지 못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콱 막히고 눈물이 핑 돈다. 자기연민 때문이 아니다. 이제는 그렇게 엎드리고 있는 어린 나를 먼 발치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세월이 흘러버렸다. 그때의 간절함은 내 평생에 없었고, (큰 이변이 없다면) 앞으로도 흔치 않을 간절함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 법. 죽음은 벌어졌고, 간절함만이 홀로 남겨졌다. 쓸쓸할 따름이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난 간절함을 피하며 살아왔다. 간절해지는 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망이 이뤄질 수 없을지 모른다는 슬픔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 후로 입시에도, 학업에도, 취업이나 커리어에도 100% 간절해지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을 겪어도 무사히 버텨내는 근육이 생겼지만, 부작용도 존재했다. 내가 뭘 원하는지, 거기에 간절함을 쏟고 싶은지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이 됐다.
섣불리 방어할 필요가 있을까. 내게 주어진 삶은 온전히 살아려면 일희일비를, 간절히 바라는 바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동안 그러지 못 했음을 새삼 느낀다. 세포를 키우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임신 준비'의 경험은 내 안에 잠들어있던 취약점을 건드렸다. 나는 아마도 아이를 갖고 싶은 듯한데, 그러나 거기서 비롯되는 설렘을 미리 거세하기 바빴다. 그래서 적극적이지도, 소극적이지도 않은 난처한 입장에 처해있었다.
이제는 회복탄력성을 기를 때다
희망은 좌절될 수 있다. 그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 다만 좌절이 반복될 때, 혹은 간절함을 너무 크게 손상당했을 때 '편향'이 발동을 건다. 모든 기대감을 '아닐지도 몰라'라고 다스린다. 그리하여 데미지를 줄이는 방향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행동한다. 사실 상처는 그 크기부터 다양해서 얼마든지 회복해낼 수도 있는데, 너무 큰 아픔에 놀란 나머지 어떤 생채기도 용납하지 않는 태세를 취한다. 간절함을 피해 데미지 자체를 줄이려 한다.
하지만 인생사 모든 일에 가드만 올리며 살 순 없을 터. 이제는 기대와 실망을 겸허히 받잡을 수 있는, 나 자신의 감각과 감정에 솔직한 내가 되고 싶다. 설령 그로 인해 내가 더 연약한 인간이 될지라도 기꺼이 그리할 수 있는 어른이 되면 어떨까. 다치고 낫는 무모함이 필요할 때다. 겁부터 집어먹지 말고, 간절함을 피하지 않고. 십수 년이 흐른 지금, 조금은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는 심경으로 기록(글)을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