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로 그리는 지독한 일상,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20대 초반에는 전화 받는 걸 어려워 했다. 전화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전화가 무서워서였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잊을 수 없는 시퀀스가 있다. 내가 한동안 전화 받기를 피했던 이유도 그 잊히지 않는 시퀀스에 있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고3이었던 나는 공부를 하다가 농땡이가 피우고 싶어 티비를 켰다. 영화 <7급공무원>이 방영 중이길래 끝까지 봤다. 곧 저녁 시간이었다. 그러다가 아빠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당시에 나는 휴대전화가 없었으므로 아주 종종 내게 온 연락이 그리로 갔다. 화면에는 친구 이름이 떠있었다.
의아했다. 전화를 걸 친구가 아닌데 무슨 일로?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전해들었다. 친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몸이 아픈 까닭에 학업을 쉬었던 친구가 눈을 감았다는 사실을 유족으로부터 전해듣는 전화였다. 분명 2달 전까지만 해도 다시 학교에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던 친구의 문자가 무색했다. 전혀 예상치 못 했고, 겪어본 적 없는 현실에 무언가 딱 끊어지고, 심장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울며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거기서부터 기억은 엉켰다. 검정 칠이 된 것마냥 아득해졌다.
그 후로 내게는 스마트폰이 생겼다. 카카오톡이 보편화했고, 다들 페이스북을 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일상적으로 전화가 오는 걸 막을 순 없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전화가 끊기기를 기다렸다가 내가 콜백을 하는 식으로 통화를 했다.
요즘 젊은이들에 흔하다는 '전화 포비아'인가 보다 생각했다. 허나 그들이 "어떻게 통화해야 할지 어려워서" 전화라는 수단 자체를 꺼린다는 기사를 보고 '이게 뭐야' 의아했다. 아, 전화가 왔다는 화면 자체를 피하는 건 아니라는 건가 싶었다.
난 왜 화면에 이름이 뜨는 게 너무 무섭지?
놀랍게도 혼자만의 기이한 반응이 차차 잦아든 시점은 기자 생활을 하면서였다. 전화를 안 받을 수도 없고, 모르는 번호든 아는 이름이든 수시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으면 업무든 클레임이든 그 내용은 다양했다. 내가 예기치 못한 커다란 슬픔 따위는 없었다.
그러한 종류의 전화에 점차 익숙해지며 자연히 내가 전화를 받는 횟수도 늘어났다. 이제는 진짜로 거짓말 같이 아무렇지 않다. 예컨대 주형이와 연애하던 초기에만 해도 화면에 주형이 이름이 뜨면 마음이 덜컥거리고 삐걱댔는데, 이제는 일상의 반복, 그 예측가능성을 좀 더 믿게 됐다. (나중에는 내가 전화를 일부러 바로 안 받는다는 걸 주형이도 알았다.)
자신을 흔드는 위기와 불확실성을 맞닥트렸을 때 인간이라면,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반응을 한다.
머리가 좋은 동물은 종종 그 상황을 학습해 후일을 대비하기도 한다. 하지만 간혹 태세가 과해 지나치게 방어적인 감각을 곤두세우곤 한다. 그게 오래 누적되거나 큰 고초를 치르고 나면 까딱 잘못될까봐 움츠러든다. 전혀 진실하지 않게 바깥 세상을 받아들이거나 너무나 미래를 방비하려 하거나 잘못된 학습의 악순환에 빠져버린다. 생존 방식 때문에 스스로 탈이 나는 셈이다. 전화기에 누구 이름이 뜨는 그 자체를 외면하려는 것처럼.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을 보며 인간의 생존 욕구와 본능에 대해 곱씹게 된다. 예민함과 불안함, 안간힘을 써서 자신을 보전하려는 왜곡들이 사람의 삶에 어떻게 뿌리내리는지 여러 에피소드로, 시각적인 연출로 표현돼 있는 작품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기만의 고통에 갇히는 때가 있는데, 그 크기와 무관하게 홀로 어떤 분투를 하는가 마음 아프게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라고 생각한다.
드라마를 지켜보며 남 이야기뿐 아니라 나와의 접점을 발견할 수 있어 좋은 드라마였다. 그러면 "오늘도 곁에 남은 생존자"로서 타인을 바라볼 기운이 생겼다. 특히 공시생 김서완 환자의 에피소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판티저스럽고, 가장 지독하게 현실적인 이야기를 펼쳐 보였다. 누구나 인생에 한 번쯤 코너에 몰리고 고장이 나곤 하는데, 현실이 주는 막막함이 어떻게 마음을 망가트리는지 들려주는 듯해 진심으로 슬펐다.
결국 괴로운 굴레는 한 가지가 해결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주위 사람들을 겨우 2-3년 사이에 연이어 여의고서 내게는 누군가의 병증을 과도하게 해석하는 특이한 사고체계가 자리잡은 적이 있었다. 역시나 연애 초기에 주형이가 피곤해서 여러 차례 코피를 쏟았다고 분식집에서 펑펑 울고 버스에서도 울고, 왜 아프냐 어디 병원 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 발을 동동 굴렀다.
누구나 다 그정도의 걱정과 불안을 품고 사는 줄만 알았다. 나의 인식이 편향된 것임을 애인이 넌지시 일러줘서, 사실 그 이후에도 여러 해 주형이가 멀쩡하게(?) 잘 지내는 걸 보며 안심이 됐다. 이전과 다른 경험이 쌓이고, 평범한 하루가 더 잦고 값지다는 걸 받아들이며 점차 무던한 어른이 될 수 있었다.
항간에서는 "바늘에 찔렸다면 찔린 만큼만 아프라"고 조언한다. 바늘에 찔린 것인데 나라 잃은 마냥 드라마 속 비련의 주인공이 되지 말라는 의미다.
허나 바늘이 준 아픔을 과장하는 것만큼 바늘에 찔린 줄도 모르거나 바늘에 찔리지 않았다고 여겨버리는 상태야말로 위험하지 않을까. 바늘에 찔려서 아팠다, 다음에는 바늘을 조심하자고 스스로 학습하기까지 과정과 인내가 필요하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옛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바늘에 찔린 아픔을 견뎌낼 수 있는 역량에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어제 저녁에는 아빠의 부재와 그가 남긴 상흔에 대해 언니와 이런저럼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었다. 족히 10년은 훌쩍 지나간 일련의 시퀀스지만, 사람의 여생을 좌우하는 10대에 너무 많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아빠의 과오, 아빠의 사랑, 아빠의 죽음과 이후 우리가 어떤 무게를 견디며 지내왔는지 공유하다 보니 참 이 또한 쉽지 않았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유산은 유산으로,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으로 적당히 묻고 고이 간직하는 훈련을 지금도 하고 있다. 혼자만 안고 있던 이상한 반응과 기울어진 마음을 이제는 가장 가까운 이해관계자와 털어넣을 수 있어서, 그만큼 우리가 세월을 감내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드라마 속 인물들처럼 결국 비를 맞는 서로를 위해 곁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그 연약한 존중만으로도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떠받치며 살아갈 수 있지 않겠나. 온가족이 드라마까지 두런두런 시청하고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떠오른 파편들을 기록으로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