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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열매 Apr 13. 2023

[국내협동조합 역사④] 협동의 공동체를 기억하다

2017년 서울시협동조합지원센터에 기고한 글을 가져왔습니다. 

https://m.blog.naver.com/seoulcoopcenter/221349120695



협동조합 운영을 단지 돈벌이 수단으로, 협동조합 조직의 틀을 이용하려는 것만은 아니리라. 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의 참여, 조합원 모두의 합의를 가져가야 하는 그 지난한 과정을 조직의 구조 안에 자연스레 새기고 있다. 그래서 더 많은 수익을 내겠다고 사업의 목적을 둔 이들이 가져가기에는 적절치 않은 조직일지 모른다.


협동조합은 분명 사업체이지만 동시에 사람들이 모인 결사체(association)이다. 함께 모여 협동조합이라는 조직을 굴리다 보면 자연스레 협동의 형태를 일터에서 삶의 터전으로 확장 시키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일까?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만들어지고 운영되는 협동조합의 경우 그들이 꿈꾸던 협동 공동체 혹은 이상촌(理想村)에 대한 바람을 키워온 것을 볼 수 있다. 협동조합과 이상촌을 일구겠다는 바람은 어느 것에 선후관계를 두지 않고 한 데 어울려 자연스레 싹터 오른다.


로버트 오언(Robert Owen)이 스코틀랜드 뉴라나크(New Lanark)에서 일군 협동조합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협동조합의 선구자들이 꿈꾼 협동조합공동체, 이상촌의 기억들이 있다는 사실은 막상 잘 다뤄지지 않는다.

개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고 경제적 평등을 보장하는, 사람의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던 이들의 이상촌을 향한 모험의 기록을 들춰보는 과정에서 오늘날 우리가 협동조합을 통해 만들고자 하는 진정한 변화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고(故) 이건우 선생 7주기(2008년) 추모식 브로셔.


풀뿌리 협동의 가치, 화남협업농장

1950~1960년대 우리사회의 화두는 어떻게 농업 환경을 개선할 수 있을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농업생산력의 획기적인 증진이 필요한 상황에서 당시 정부는 제도적 지원을 통해 협동농장, 협업농의 방식을 구상한다.

그러한 논의가 본격화되기 전인 1961년 이미 협업농장의 기반을 닦은 곳이 있다.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하길리(현재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에서 이건우 선생 주도로 시작된 화남협업농장이 바로 그곳이다.

황무지를 개척해 협업농장의 첫 삽을 뜬 이건우 선생은 반월신협을 창립하고 한우리생협을 설립해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일본의 협동조합과의 교류를 통해 한국 협동조합 운동의 진전을 이끌었다.

이 선생은 아무리 정책이 훌륭해도 그것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기반이 먼저 마련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협업농장이라는 실천을 통해 풀뿌리에서부터 협동의 가치를 닦는 작업이 갖는 의미를 보여줬다.


협동의 경영은 구성원 모두의 적극적인 참여와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이 가장 중요하고 또 어렵다. 화남협업농장에서도 인적 구성원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지하고 협동의 경영, 협업의 가치를 구성원 각자가 어떻게 체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다음의 경향신문 기사는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를 보여준다.


협업농업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인화문제(휴먼릴레이션)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분열되면 협동 그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 기성관념을 타파시킬 집단생활에 알맞은 인간개조를 시키는 문제인 것이다. 이들은 이 인간개조를 소위 분위철학이란 것으로 실천한다.

분위철학이란 ① 여하한 사람이라도 성내지 않는다, ② 분위에 선다(기존의 지식, 경험, 사상풍습, 사회상식, 학력, 구력일체를 뽑아버린다), ③ 자타일체의 이를 안다, ④ 연찬이 참된 행복임을 초래하는 방법임을 알고 이것을 실천한다, ⑤ 사의를 존중하고 공의를 행한다는 뜻이다.
- 화남협업농장을 찾아, 경향신문, 1966.2.21.


설립 10년 이내 주택시설은 물론 유치원목욕탕도서실 등 문화시설 등의 설립으로 협동의 가치를 중심에 둔 공동체 건설을 꿈꾼 화남협업농장의 실험은 아쉽게도 현재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화남협업농장의 시도가 있었기 때문에 자발적인 운동들이 싹틀 수 있지 않았을까?(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야마기시즘*을 실현하는 산안마을의 첫 시작에 화남협업농장 초기 구성원인 조한규 씨가 참여했었다.) 머릿속에서만 꿈꾼 이상적인 협동의 틀을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한 화남협업농장의 도전은 꿈꾸는 사람의 실천이 어떻게 사회변화를 일궈낼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야마기시즘 : 무소유 공용 일체생활을 바탕으로 소유가 아닌 공유하자는 사회운동. 일본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현재 하남시 천현동. <출처:네이버 지도 캡처>


한국의 덴마크, 선린촌

선린촌은 1960년대 후반 서울 근방 광주군 동부면 천현리(현재 하남시 천현동 일부 지역)에서 최문환 목사를 중심으로 설립됐다. 이상적인 모범농촌을 건설하려는 개척정신과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양계와 축산을 주요 생산기반으로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원칙에 따라 생산과 판매, 구매를 공동으로 운영했다. 이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생산조합은 물론 생활필수품의 공동구매를 위한 소비조합, 마을 주민들의 금융문제 해결을 위한 신용조합을 함께 조직하여 성과를 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는 선린촌을 한국의 덴마크라 지칭했는데, 그만큼 선린촌은 안정적인 운영을 보여줬다.


13년 전에 10여 가구의 난민 교인들이 정착해서 현재 3만여 평에 약 50가구가 한국 속의 덴마크를 이루고 있는 이 기독교 선린촌의 창설자 최문환 목사는 한국에서도 조합법대로만 강행하면 협동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확증하고 있다.         
- 소비자보호 카르테 (3) 조직, 동아일보, 1967. 10. 12.


하남선린신협 퇴촌지점,<출처:하남선린신협 블로그>


마을의 경제를 한 데 묶었던 3개 협동조합은 초기 활발히 운영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초기의 목적과 운영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신용조합만이 제 역할을 한다. 신용협동조합은 마을주민 대상에서 인근 지역주민들의 조합원 가입을 허용하면서 지역사회로 그 범위가 확대됐으며 현재 '하남선린신협'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1975년 당시 연구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선린촌의 부채비율은 전국 농가 평균과 비교해 매우 낮은 수준이었으며 고금리의 고리채를 갖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부채가 있는 경우에도 마을에서 공동운영하는 신용조합이나 이웃 주민에게 빌린 정도였으며 이자가 없는 단기융자 형태인 것으로 확인된다(류태영, 이풍길, 1995 재인용).

당시 마을 주민들 사이의 상호신뢰가 전반적으로 두텁게 형성되어 있음을 가늠할 수 있는 지점이다. 초기 선린촌의 구성원들은 다른 어떤 관계보다 상부상조의 협동정신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이러한 특징이 마을규약, 신규회원의 조건과 가입 절차 등에 담겨 있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존재했음에도 선린촌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은 주민들간의 공동체 의식, 개척자 정신, 그리고 협동의 정신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선린촌이 위치한 지역에도 도시화, 산업화의 바람이 불고, 내부 구성원의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선린촌이 추구한 이상촌으로서의 가치와 공동체의 특성이 사라지게 된다.


사람들 각자가 기대하는 완전한 이상을 담은 협동조합 공동체를 실현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것일지 모른다그럼에도 척박한 환경에서 끊임없이 꿈꾸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실천했던 협동조합의 선구자들의 역할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협동조합으로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기대를 품는 것이 아닐까.

협동조합이 기대하는 변화의 원형이란 평등과 자유의 가치를 협동하여 실천하는 것즉 협동의 의미를 삶 속에 뿌리내리기 위한 노력 그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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