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별생각이 없이 끝난 검진의 결과지엔 전문의와 정밀검사를 요청하는 짧은 문장이 하나 있었어요. 그리고 연이어 진료를 권한다는 전화를 받고 나니 덜컥 맘이 무거워졌습니다.
성격이 워낙 급한 데다 작은 마음(...)의 소유자라 무슨 일인지 빨리빨리 알아내고 해치워야 한단 생각에 호다닥 병원을 알아보고 검진을 받았어요. 의사 선생님은 애매한 상황이라며, 3개월 후에 다시 검진을 권했습니다. 매사 시작과 끝이 명확한 것을 좋아하는데, 확실하기보다 애매한 지금 이 상황에 오히려 안심되더라고요. 제게 개선(!)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니까요.
그동안의 거친(?) 생활을 반성하며 저 자신을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 연말이 다가오고 한 해를 회고하는 작업은 필요하다 느꼈는데 건강의 적신호가 그런 필요를 더 강하게 가져왔다고나 할까요? 이런 제 마음 상태와 맞물려 이번 뉴스레터에선 몸과 마음과 관련된 사회적경제 조직을 살펴보려 합니다.
건강과 돌봄에 관한 사회적경제 조직을 생각하면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료사협)이 바로 떠오릅니다.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간다는 측면에서 의료사협은 지역을 거점으로 지역주민과 조합원, 그리고 의료진의 신뢰와 협동에 바탕해 활동합니다.
지난 9월 25일 한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30주년 기념행사 및 심포지엄이 열렸습니다. 1994년 안성의료생협 창립으로 시작한 의료사협은 2024년 9월 기준 전국에 30곳의 조합으로 확장됐습니다. 전국 30곳의 의료사협에서 한의원, 치과, 주간보호센터 등 운영하는 사업소는 119곳이고 그곳에서 약 3500여명의 직원을 채용하고 있어요. 물론 숫자로 다 드러나지 않는, 의료사협이 우리 사회에 만든 의료와 돌봄의 공공성 확보에 대한 기여, 지역기반 환자중심의 의료구축 노력, 의료인과 주민들의 협동체계 구축 등의 가치와 의미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30년간 30곳의 의료사협이라니! 1년에 한 곳이 생기는 꼴인데요, 의료사협의 시작과 운영이 결코 쉽지 않겠구나 짐작할 수 있는 숫자입니다.
의료사협의 전체적인 변화의 과정은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 제도변화> 논문을 살펴보시면 도움이 많이 됩니다. 소비자생협법에 따른 조직에서 협동조합기본법 제정 이후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조직 형태가 변경되기까지 그 흐름 속에서 의료사협은 보건의료 영역의 한계를 확장하고, 사회적경제는 물론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의 네트워크 속에 의료사협만의 포지셔닝을 구체화하게 됩니다. 논문이 2020년에 출간됐으니 현재 시점의 의료사협은 조금 다른 모습일 수 있겠죠. 고령화와 저출생, 지역소멸이란 변화의 과정에 있는 지금, 의료사협이 우리 사회의 당면 과제를 어떠한 방식으로 해결해갈지 지켜봐야 할 부분입니다.
의료사협 외에도 여러 협동조합이 있더라고요. 인상 깊었던 협동조합은 암 생존자의 자립, 사회복귀를 돕는 ‘캔프협동조합’이었습니다. 지난해 6월 설립한 캔프협동조합(CANF: Cancer Free, Cancer Friends 암으로부터의 자유, 암을 통해 만난 친구들)은 암 경험자와 가족들의 협동조합입니다. 암 경험자의 심리나 치유를 도와주는 자조모임은 많지만, 이들의 사회복귀를 돕는 곳은 많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캔프협동조합은 암 경험자들의 사회복귀에 집중하는데요, 크게 5가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쇼핑몰 사업: 암 경험자 및 그 가족이 제조 또는 추천하는 제품 판매(도서, 예술 작품, 현미 등 판매)
문화예술 창작사업: 조합원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책, 오디오북, 연극 등을 기획 및 제작
암 예방 치유사업: 암환자 라이프 코칭, 구인구직 연결 등
전시회 사업: 암 관련 박람회 등 개최
컨설팅 사업: 암 관련 제품 및 병원 개발 전 피드백 과정 참여
암경험자나 가족이 아니더라도 건강에 관심 있는 누구나 조합원으로 가입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조합원 유형을 생산자·소비자·자원봉사자 조합원(출자금 10만원 이상), 그리고 후원자 조합원(출자금 100만원 이상)으로 구성된 캔프협동조합은 현재 70여명의 조합원이 참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 1년차에 접어든 캔프협동조합이 앞으로 어떤 활동을 펼쳐나갈지 더 기대됩니다.
잘 알려진 ‘레드리본사회적협동조합’도 사회적 약자의 자립에 집중하고 있는 협동조합입니다. 2013년 설립한 레드리본사회적협동조합은 국내 최초의 HIV/AIDS 감염인의 자활을 위한 협동조합이자 사회적기업입니다. 에이즈에 대한 인식개선과 에이즈 감염인의 일자리 창출, 지역주민의 건강 증진을 위한 에이즈 예방 교육 등이 주된 활동인데요. 가장 대표적인 사업이 에이즈 감염인과 비감염인이 함께하는 카페 ‘빅핸즈(BIG HANDS, 세상 밖으로 나온 감염인에게 보내는 큰 박수, 큰 격려)’입니다. 빅핸즈의 수익금 전액은 에이즈 인식사업을 위한 공익사업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구에서 활동하는 레드리본사회적협동조합이 첫 카페를 오픈할 때만 해도 주변의 따가운 시선으로 어려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혐오시설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인데요, 3년 가까이 인근 주민들에게 설립 취지를 설명하고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장애인 카페의 조언도 구하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애썼다고요. 현재 빅핸즈 카페는 9곳이나 된다고 합니다. 거기다 지난해부터는 로스터리 카페로 우수성을 인정받아 대구시, 대구동구청의 고향사랑기부제 공식 답례품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구에서 활동하는 카페, 베이커리 분야 사회적경제 조직들이 겪는 경영상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협업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4개의 사회적경제 주체(레드리본사회적협동조합과 디자인업체 인플럭스, 친환경 커피 원두 공급업체 토브커피에이전시협동조합, 제빵업체 앨리롤하우스)가 함께 만든 제로웨이스트 카페 ‘그린그루브’ 운영(5곳), 그리고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재사용하는 습관을 지역사회에 확산하고자 다회용기 서비스인 ‘래빗(REBIT, Reusable Habit)’을 런칭하기까지 했습니다. 2023년 기준 레드리본사회적협동조합의 매출액은 1억8천만원입니다. 고용인원은 27명(2022년 기준)이고요.
레드리본사회적협동조합의 목표는 에이즈 감염인 자활을 위한 통합센터 구축입니다. 아마 2020년 지역자산화를 통해 확보한 뉴하모니가 그러한 목표 달성의 커다란 걸음이 아닐까 싶어요. 2018년부터 지역의 사회적경제 조직이 안정적이고 원활한 활동과 지역사회 기여를 위해 부동산 공동 매입을 추진했고, 2020년 2월 매입 계약 체결, 같은 해 8월 입주로 ‘뉴하모니’가 설립됐습니다. 건물 대지 100평, 5층, 연면적 250평 규모의 뉴하모니 건물에서 레드리본사회적협동조합은 1층에 소셜카페 빅핸즈와 2층 사무국, 5층에 에이즈 감염인을 위한 사회주택 꿈담채를 운영하고 있어요. 한편, 사회적가치 사업으로 빅핸즈 레드 케어(HIV 감염인 의료연대기금 사업), 빅핸즈 우애기금(조합원 소액 대출 사업), 지역 연대 사업(사회적 자산화, 지역연대 활동) 등 다양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죠. 레드리본사회적협동조합이 지난 10여년간 쌓아온 열정의 기록을 살펴보는 것만으로 에너지가 충전되는 기분입니다.
레드리본사회적협동조합의 사례를 다룬 논문을 찾아보다 이 논문을 찾았습니다! 바로 <소셜 프랜차이즈와 사회적 협동조합과의 비교분석: 심층 인터뷰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인데요. 소셜프랜차이즈로 히즈빈스(㈜향기내는 사람들의 대표 브랜드로, 정신장애인이 바리스타로 일하는 카페인 ‘히즈빈스’가 대표적인 브랜드입니다. 이곳도 꼼꼼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사회적기업이죠!)를 사회적협동조합 사례로 레드리본사회적협동조합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인터뷰를 통해 두 곳의 조직 목표, 선택 동기, 운영방식, 성과 측정, 사업확장이라는 5개 항목을 비교해보고 있는데요. 두 모델 모두 “사회적 문제 해결과 가치 실현을 주목적으로 두고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사업운영을 목표”로 한다는 유사점을 갖고 있었지만 선택 동기와 운영방식, 사업확장 측면에서 차이가 있음을 확인합니다. 예를 들어, 운영방식에서는 조합원 의결 중심의 협동조합과 본사 의결중심의 소셜 프랜차이즈가 다르고, 사업확장 측면에서 볼 때 사회적협동조합보다 소셜 프랜차이즈가 더 용이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살펴봤듯이 레드리본사회적협동조합은 빅핸즈는 물론 그린그루브, 래빗과 같은 브랜드를 함께 운영하며 사업확장 방안을 다양하게 모색하고 있어요.
한계를 두지 않고 나아가는 사회적경제 조직들의 모습을 보면, 계속 시도하고 성공의 모델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단 생각을 합니다. 그런 움직임이 더 널리 알려질 때, 더 많은 기회와 가능성이 생기리라 생각하고요.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며 스트레스 받지 말자는 말을 하는데, 저는 그 말에도 스트레스를 받아요 이런 나 자신을 잘 견뎌내며(?) 버텨야 하겠죠. 얼마 전 읽은 <철학의 쓸모>라는 책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책임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었는데요. 인상 깊었던 부분이라 좀 길지만 그대로 옮겨 적어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온전히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의 충격 요법은 이런저런 핑계를 허용하지 않는다. 존재할 것인지, 존재하지 않을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은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선택을 하게 되는데,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 역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비겁한 사람이 될 것인지,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인지,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인지, 아니면 존중받는 사람이 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선택을 하고 이를 통해 정체성을 드러낸다. 사회적 지위가 부여한 정체성과 성격으로 형성된 개성에 의존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스스로 선택할 자유에 직면하지 않으려는 거짓된 핑계이자 변명일 뿐이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불안한 세상에 내던져진 우리는 삶의 ‘매 순간’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스스로 존재 가치를 결정해야 한다. 모든 행위, 심지어 실패로 귀결된 행위까지도 선택의 결과일 뿐이다.”
_ 철학의 쓸모, 로랑스 드빌레르 作
따지고 보면 사회적경제 조직들도 각자의 상황에서 새로운 선택을 하고 책임을 지며 변화를 만들어갑니다. 개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겠죠. 일상에서 항상 이런 생각을 하며 살 순 없지만, 여기저기에 휩쓸리지 않도록, 나라는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어요. 모호함과 불확실함을 견디는 요즘입니다. 모쪼록 구독자분들께서도 시작도 끝도 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지치지 않으시길요. 건강하세요!
뉴스레터 <오늘의 논문>에 실린 글을 다시 올리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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