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하지 않기로 해요

by 신열매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잘 지내셨나요? 새해가 시작된 지도 벌써 보름이 훌쩍 지났습니다. 하지만 설날이 오기 전까진 새해 인사도, 한 해의 다짐도 잠깐 늦춰도 되는 것이 아닐까 마음 편한 소리를 해봅니다.�


새해와 함께 벽돌책을 꺼내 조금씩 읽고 있습니다. 셰익스피어 이후 최고의 극작가로 칭송받은 조지 버나드 쇼의 책을요. 버나드 쇼는, 우리나라에선, 오역이라곤 하지만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묘비명으로 어쩌면 더 잘 알려져 있는지 모르겠어요. 실제 그의 묘비명에는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이라고 적혀 있다는데요. 이를 좀 더 고급스럽게 번역하면, ‘오래 살다 보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당연하지’라고요. 하지만 왜인지 ‘우물쭈물하다가...’라는 오역에 더 마음이 끌립니다. 하하.


여튼, 요즘 읽고 있는 버나드 쇼의 <자본주의+사회주의 세상을 탐험하는 지적인 여성을 위한 안내서(이하 안내서)>는 800쪽을 가뿐히 넘는 두꺼운 책입니다. 그의 처제가 ‘사회주의가 대체 뭐예요?’라는 질문이 적힌 편지 한 통을 보냈고, 버나드 쇼는 그것에 대한 답변을 자그마치 3년에 걸쳐 정리했다고 해요. 영국 노동당에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정치사상가 버나드 쇼의 생각이 담겨 있어요.


그의 글을 읽다 여느 상황에도 맞아떨어지는 문장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상황을 가만히 놔둔다”는 옛날식 표현은 이제 잘 쓰지 않는다. 요즘에는 “상황이 흘러간다”고 훨씬 분별 있는 표현을 쓴다. 마침내 우리는 상황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흘러간다는 것을 안 것 같다. 흘러가는 대로 둔다는 건 무책임한 행위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니까 상황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기대하며 상황을 있는 그대로 둔다는 개념은 완전히 없애버려야 한다. 상황은 절대 그렇게 머물러 있지 않는다. 나태하게 앉아서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두리번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건 강둑에 앉아서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는 것과는 다르다. 말이 달아나고 있는데 마차 안에 멍청하게 앉아 있는 것과 같다. “그럼 나더러 뭘 어쩌라고요?” 하며 빠져나갈 수는 없다. 여러분이 무능하다고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게 아니다. 곤경에 처하면 온 힘을 다해 말을 통제할 방법을 짜내야 하고 마차가 도랑에 빠지지 않고 똑바로 가게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 한다." (<안내서> 본문 89쪽)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고 나에게 또 우리에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라는(헉헉...) 사실을 이렇게 명징하게 정리해주는 글이라니요! 문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온 힘을 다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판단을 미루고 멈추는 것이 항상 옳은 일은 아닙니다.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참과 거짓이 무엇인지 탐색해야죠. 그저 멈춰서 관망하는 것은 판단이 아니라 이미 확인된 사실마저 외면하는 것이니까요. 내가 하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가 해결해주는 때도 있겠지만, 그래서 신경 쓰지 않고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자기들 몫에 관심을 두고 대신 해결하니까요. 내가 무언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의존만 한다면 내 몫의 무언가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겁니다. 가만히 놔두고 흘러가는 대로 두고 보기만 한다면 말이죠.


뭐든 해야 한다는 건 피곤한 일입니다. 때론 일상의 안온함을 잠시 내려두어야 하죠. 그래도 행동하는 것은, 나 자신이 그 필요를 가장 절감하고 있고 아무도 나를 대신해줄 수는 없다는 깨달음이 있기 때문이겠죠?




도시의 대표적인 마을로 호명되는 성미산마을. 성미산마을은 행정구역으로 서울 마포구의 성산동, 망원동, 연남동 등을 아우르고 있고 해발 66미터의 성미산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을 기르는 환경에 대한 아쉬움을 공동의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공동육아에서 시작해 대안학교를 설립했고, 동네 사람들은 더 나아가 생협, 마을극장, 마을카페 등을 만들며 마을의 역할을 확대했어요. 그 성미산이 지난해 30주년을 맞았습니다. 주간경향에서 이를 꼼꼼하게 다루고 있어요. 관련 기사를 읽어보시면 좋습니다.


마을은 삶의 터전입니다. 어찌 됐든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곳이죠. 삶의 현장을 둘러싼 변화에 지역주민들은 함께 대응하며 필요를 충족하고 수시로 발생하는 갈등을 해소합니다. 성미산마을은 마을 안의 생산과 소비, 고용을 ‘친환경’, ‘대안생활’이라는 사회적 가치와 연결해 마을공동체의 외연을 경제, 생활공동체로 넓혀갑니다. 공동육아에서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주민들의 확장되는 필요와 함께 모양새도 변화해가죠. 아이를 위한 활동에서 어른을 위한 활동으로, 다시 공동체 전체를 위한 활동으로 옮겨가고 순환해갔다고 생각합니다. 마을이라는 일상 공간에서 이웃과 함께 생활의 필요에 따라 다종다양한 단체들을 함께 만들며, 공공의 영역을 구축해 간 것이죠. 하지만 신앙공동체처럼 철학과 신념을 완전히 공유하는 곳은 아니기에 똑같이 싸우고 때론 이기적인 모습을 볼 수도 있다고요. 누군가의 요구가 아니라 개인의 필요와 자발성에 의한 것이기에 필요가 있는 개인이 기회와 자리를 만들어 갑니다.


“마을은 주거 공간 속에서의 마을뿐만 아니라 온라인 동호회도 마을이고 성적 소수자들의 긴밀한 커뮤니티도 마을이며, 신촌과 홍대 앞의 문화예술인들도 마을이고, 환경단체의 회원들도 마을일 수가 있다. 그 커뮤니티가 폐쇄적이든 개방적이든 상관없다. 자기와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성미산마을은 그들만의 리그일수도 있지만 반대로 개방적이기 때문에 성미산마을은 문화와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언제라도 접속이 가능하며 열려 있다.” (위성남(2013). “도시 속에서 함께 살아남기: 성미산마을”, 황해문화, 80권, pp.61-78)


그러니까 성미산마을과 궁합이 맞는다면 그 관계를 두텁게 해갈 수 있겠죠. 누군가에겐 밀도 높은 관계망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겐 느슨한 관계망일 수도 있고요. 그 경계를 설정하는 것은 개인의 몫일 겁니다. 이것도 일단 행동해봐야 알 수 있겠죠. 직접 참여해보고 함께 부대껴본 뒤에야 나랑 맞는구나 혹은 안 맞는구나를 확인할 수 있죠. 아무것도 하지 않고선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성미산마을에 관한 논문은 2010년대 중후반 특히 많아요. 대략만 검색해봐도 논문이 꽤 나옵니다. 비교적 최근의 논문 하나를 소개합니다. <성미산 마을공동체 형성요인과 효과적 운영에 관한 제도 분석(2021)>이란 석사학위논문입니다. 자연자원이 아닌 공동체를 공유재라는 관점에서 들여다본 연구여서 흥미로워요.


연구자는 오스트롬이 제시한 8가지 성공적인 공동체 디자인 원리를 적용해 성미산마을이 8가지 특징 중 어떤 특징을 갖고 있으며, 행위자들(조합원) 상호작용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봅니다. 먼저 오스트롬이 언급한 8가지 원리는 각각 다음과 같습니다.


1) 명확하게 정의된 영역(Clearly defined boundaries)으로 여기서 영역은 공동체 안의 각종 유무형의 공유자원의 물리적·사회적 영역을 의미합니다.

2) 실행규칙이 현지 조건과의 부합하는지(Congruence between appropriation and provision rules and local conditions)로 이는 자원을 둘러싼 제도적 장치가 지역자원의 특성을 잘 반영하는지를 의미합니다.

3) 참여적 의사결정 구조(Collective-choice agreements)

4) 감시 활동(Monitoring)

5) 점증적 제재(Graduate sanctions)

6) 갈등 해결 장치(Conflict resolution mechanisms)의 존재 여부

7) 최소한의 자치 조직권 보장(Minimal recognition of rights to organize)

8) 중층의 정합성이 있는 조직(Nested enterprises)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인데요. 규모가 큰 공동체에 필요한 제반 조건이라고 이해됩니다.


8가지 제도 원리가 어떻게 성미산마을에 작동됐는지를 살펴보면, 협동조합의 원칙에 바탕해 다양한 조직을 설립하고 운영에 참여하는 조합원들은 스스로 실행규칙을 고안하고(제도 원리 3), 이 규칙이 실행될 수 있도록 점증적인 제재를 작동시킵니다(제도 원리 5). 조합원이 어떤 권리를 가졌는지는 정관과 운영위원회 규칙으로 명확히 정의되어 있고요(제도 원리 1). 성미산마을의 다양한 공동체별 특성에 맞는 실행규칙이 조합원들의 활동을 효과적으로 제한하는(제도 원리2) 제도적 원리가 성립되어 있는데요, 다만 공식적인 감시 활동(제도 원리4)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통이라는 공동체만의 공식/비공식적 갈등 해결 장치(제도 원리6)가 있고, 마을자산화로 최소한의 자치 조직권을 보장하고 있다고 봅니다(제도 원리 7). 마지막으로 서로 다른 소규모의 공동체들이 네트워킹하며 하나의 큰 공동체를 이루는 사업 단위(제도 원리8)를 볼 수 있다고 봅니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역시 논문을 직접 살펴보시는 것이 좋지요!�


한창 마을공동체, 마을만들기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성미산마을이 대표적인 사례로 많이 언급됐어요. 2012년부터 서울시에서 마을공동체만들기 사업 본격화하면서 성미산마을은 대안적 경제시스템을 만들려는 외부의 실천들과도 연결됐죠. 서울의 높은 집값은 주거 불안정성을 가져옵니다. 단기간 거주가 중심인 상황에서 지역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요구하긴 어려워요. 마을은 있지만 마을에 있는 사람을 찾기 쉽지 않죠. 생업을 뒤로 하고 마을 일에 집중할 사람이 많진 않죠. 그래서 마을만들기가 사업화되면서 지자체나 정부기관으로부터 사업비를 지원받아 인건비를 마련하는 구조로 공동체가 운영됐습니다. 그러다 지원이 끊기면서 자생적인 구조를 갖출 것을 요구받고요. 다들 사람의 역량을 키우고 주민 관계를 강화하고 지속가능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잖아요. 말처럼 쉽지 않은 그 관계를 만들어온 지난 30년이 굉장하다고 생각될 뿐입니다.




요즘 한창 관심 있게 들여다보는 곳이 대구 안심마을입니다. 지난해 1월 한겨레에서 심층 보도하기도 했는데요. 성미산마을과 닮은 듯 또 다르더라고요. 관련 자료를 읽다 <안심에서 놀고 자란다>라는 책자를 읽게 됐어요. 그중 와닿는 글이 있어 적어봅니다.


“(중략)그런데 워크샵 가서 끝까지 나의 이야기를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은, 혹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이 가능한 것은, 끝까지 이야기해도 서로가 관계가 끊어지지 않을 거라는 신뢰. 기본적인 믿음이 있기 때문이에요.”

다름의 <인정>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돈다. 서로 더 이해하려고 이런 시간을 가지는 둥지의 아마들이 새삼 멋지게 느껴지기도 했다. 대개 불편한 이야기는 안 꺼내면 그만이다. 마음 상하고 섭섭하며 ‘안 보면 그만이지’하고 생각하기 쉬운 세상 아닌가." (본문 140쪽)


변화를 만들고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행동한다는 것은 상대방과 조직, 넓게는 사회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기 때문이겠다 싶더라고요. 잘할 수 있고 잘 해낼 수 있다는 기대 말이죠. 그게 있어야 뭔가를 할 수 있겠다 싶어요. 지금은 믿음과 신뢰를 좀 더 촘촘하게 다져가는 과정일까요? 우리 모두에게 말이죠. 그런 기대로 새해를 다시 시작해봅니다.�




뉴스레터 <오늘의논문>에 실린 글을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https://diveintocoop.stibee.com/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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