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은 우선 시키는 것부터 잘해야 한다

2021.06.14

by 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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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대학원에 입학한 대학원생은 높은 이상을 갖고 있습니다. 논문 많이 읽고, 필요한 공부도 많이 하고, 지도교수 혹은 연구실 구성원들과의 토의를 통해 좋은 주제를 잡아 자신만의 연구를 쭉쭉 해 나가는 상상을 합니다. 아마 모든 대학원생이 그럴 거예요. 저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남들과 다른 나만의 연구, 나만의 무엇인가를 갖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한 것이니까요. 그러다 보니 대학원 생활을 잘한다는 것에 대한 세세한 정의는 다 다르더라도, '훌륭한 대학원생은 자신만의 연구를 정해 진행하고 있다'는 것에는 모든 대학원생이 동의할 겁니다.


하지만 제가 1년 반 정도 경험해 본 대학원 생활은 자신만의 연구를 하는 것이 왜 높은 이상이라고 표현되어야 하는지를 혹독하게 알려주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아직까지도 주제를 잡아 나가고 있는 단계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주어진 시간 동안 논문을 안 읽거나, 공부를 조금 했거나, 토의가 부족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꽤 열심히 정리해 보았던 크고 작았던 연구주제들이 계속해서 논리적인 퇴짜를 맞았을 뿐이죠.


그러다 보니 우선은 지도교수나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언가 자존심도 상하고 이건 연구로써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별 수 있나요. 저는 천재가 아니었고 부족한 경험과 논리로 제 연구주제가 의미 있다고 납득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일단 앞서간 사람들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요. 그렇게 1년 반 정도가 지났고, 다행히 주제를 잡으려는 노력을 놓지는 않아서 그 논리가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는 듯합니다.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훨씬 더 크게 들긴 하지만요.


아마 압도적인 재능이 있어 이미 연구자로서 본인의 관점을 갖고 있다면 이렇게 시키는 걸 해야 하는 과정을 겪을 필요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분야에 속한 남의 관점, 특히 지도교수의 관점을 습득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서 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고, 하다 보면 남이 말한 논리가 왜 그렇게 되는 것인지를 이해를 넘어 체득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단순히 논문을 읽듯 머리로만 이해하는 건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경험해보지 않으면 그 논리가 가지고 있는 날카로운 직관까지 얻어갈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렇게 충분한 시간과 노력이 쌓여야만 비로소 자신의 것을 만들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부터 조금씩 남의 관점에 대해 연구적으로 합당한 비판을 해나갈 수 있고, 자신만의 색깔을 입힐 수 있을 거예요.


대학원에 올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이게 꽤나 자존심 상할 수도 있을 거예요. 나의 논리를 발전시키기 위해 왔는데, 왠지 상사라서 무조건 그들의 말을 따르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을 테니까요. 당연히 사수나 지도교수도 충분히 틀릴 수 있기 때문에 무조건 따르는 건 연구자로서도 건강한 태도가 아닙니다. 다만 학계라는 엄밀한 곳에서 납득할 만한 논리를 갖추기까지는 꽤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정도 수준의 논리로 상사의 논리를 반박할 수 없다면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고 다른 길로 가 버리면 그건 연구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크게 좋지 않은 선택이라고 봐요. '시키는 것도 제대로 못 하면서 무슨 연구를 하겠냐'는 핀잔을 들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대학원에 처음 들어올 때 연구자로서 청운의 꿈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저 또한 크지는 않았지만 분명 작게나마 그 꿈을 그려 보았습니다. 하지만 시키는 것을 잘해나가는 과정 중에서도, 자신의 논리를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움직여야 하는 과정이 꽤나 버겁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건 비단 연구에만 해당하는 일은 아닌 것 같기도 해요. 나만의 무엇인가를 갖춘다는 건 어느 분야에서나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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