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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 May 16. 2022

재능 없는 공학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

재능이 없습니다

  '귀교에서 앞으로 훌륭한 인재로 성장하여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스스로를 그렇게까지 잘 알지는 못했던 대학 입시 시절, 자기소개서에 적었던 문구는 의외로 제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가장 잘 나타낸 표현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여러 학문 중 공학을 그중에서도 기계공학을 선택했던 이유는 과학과 기술을 통해 사람들에게 가장 실질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학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원하는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한 이후에는 제가 다른 이들에게 어떤 형태의 도움을 저답고 즐겁게 줄 수 있을지를 참 열심히 고민하고 탐구해 왔습니다. 훌륭한 인재로 성장하고 있는 중일 까에 대한 물음표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지만, 여러 경험들을 많이 해오고 저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공학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방식이 제가 추구하는 바와는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겁니다.


  대학원 시절부터 시작된 공학에 대한 매너리즘은 요즘 들어 점점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공학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공학자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해서 그런지 마음이 정말 뒤숭숭했어요. 물론 밥 벌어먹고 살 걱정이 크게 없다는 점에서는 참 감사했지만, 생존 이외에 큰 이유를 찾지 못하는 일을 평생 업으로 삼는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동안의 기록들이 보여주었듯 저는 공학에 큰 재능이 없었고, 공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건 좋아했어도 늘 애를 써야 하는 그 과정은 항상 괴로웠습니다. 또 공학이 의미 있다고 말하는 문제는 저에게 너무나도 멀고 지루했어요. 엔지니어가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제품을 만드는 것에 분명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하나의 제품이 나오기까지 너무나도 많은 중간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가치를 전달할 수 있는 디자인이나 교육, 예술이 말하는 이상에 더 눈길이 갔어요. 과학과 공학의 논리를 익히고 감탄하기보다는 한 눈을 많이 팔았고 자연스럽게 공학에 대한 자신감은 점점 떨어져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부와 대학원을 거쳐 회사에 와서도 공학을 마주하는 매 순간은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것을 억지로 붙잡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붙들고는 있는데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경우가 많았어요. '내가 지금 이걸 하는 게 맞을까?', '이것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공학을 포기할 용기는 없었습니다. 꽤나 오랫동안 해왔던 것을 버릴 만큼, 현실적인 문제들을 헤쳐나갈 수 있는 좋은 도구를 포기하고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 않은 미지의 분야에 도전할 만큼, 뚜렷한 재능이나 열정을 찾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아직 공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다룰 수 있기까지 충분한 시간이 지나지 않은 것은 아닐까 두렵기도 했어요. 공학은 중간과정이 많을 뿐 분명 제가 생각해왔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으니까요. '혹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나도 잘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나라는 사람은 원래 공학이 아니라 다른 일을 선택했어도 이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들이 공학을 완전히 놓지는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복잡한 생각이 만들어낸 짙은 매너리즘이 일상까지 가라앉게 만들고 있을 때, 힘을 내어 억지로 몸을 움직였습니다. 같은 과를 졸업한 동기를 만나러 갔는데 이 친구는 미디어 아트 작가라는 조금 특별한 진로를 택했어요. 어쩌면 제가 공학보다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영역 중에는 이 친구가 하는 예술작업도 감히 포함이 되어 있었기에, 심적으로 에너지가 바닥난 상황에서도 꽤나 먼 거리를 이동해 친구를 만나고 왔습니다. 고맙게도 친구는 반갑게 맞아주며 제가 하고 있는 고민의 조각들을 함께 바라봐 주었어요. 거기에 선뜻 같이 작업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함께 해보자는 것을 전제로 여러 가지 이야기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도전적이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친구가 부럽고 멋있게 느껴지면서 근래 느껴 왔던 약간의 박탈감이 다시금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조금 달랐던 점은 제가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작은 틈이 보였다는 겁니다. 이야기를 나눌 때 제가 기술적으로 조금 더 익숙하고 경험이 있어 빠르게 의미 있는 답을 내어줄 수 있는 순간이 있었거든요. 제가 공학을 포기했다면 그 답변들을 전해줄 수 있었을까요? 결코 아니었을 겁니다.


  묘한 기대감과 설렘이 몰려왔습니다. 뒤돌아보면 저는 큰 이상을 향해 달려가는 것도 좋아하지만, 당장 지금 가진 것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그것을 내가 느낄 수 있는가가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그런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선택지는 이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을 제대로 서포트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어요. 돌이켜 보니 이전에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해낼 때가 즐거웠던 이유는, 제가 그들에게 기여한 것이 명확하게 있었고 그 기여에 제 자신도 만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왜 혼자서 공학으로는 사람들에게 직접 도움을 줄 수 없다고만 생각했을까요? 사실 회사 안에서 팀원분들과 함께 일을 제대로 해 나가는 것도 그분들께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셈이고, 회사 밖에서도 분명 어딘가에는 저의 경험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말이죠.


  제가 공학자로서 실력을 키워야 하는 이유를 드디어 찾은 듯한 느낌이 듭니다. 저는 기술적 해결책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직접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사회적으로 큰 임팩트를 내기 위한 해결책보다는 당장 옆에 있는 저희 팀원들, 예술가나 교육자와 같은 개개인에게 직접 닿을 수 있는 해결책 말이에요. 그렇기에 기술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문제를 푸는 가는 저에게 큰 관심사가 아니지만, 어려운 문제도 풀 수 있다면 보다 제대로 된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력 있는 공학자가 되어야 하고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동시에 좀 더 부지런히 움직여 오늘과 같은 기회들을 찾아다닌다면 제가 관심 있고 가치 있다 느끼는 영역에서 공학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릴 거예요. 정말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해왔던 문제가 퍼즐 맞히듯 기분 좋게 해결된 듯한 느낌이 듭니다. 제가 믿는 가치와 공학이 드디어 접점을 찾은 듯한 느낌이 들어요.


  저는 여전히 공학에 재능도 자신도 없습니다. 부끄럽게도 자기소개서에 적었던 것처럼 공학에서 훌륭한 인재가 될 자신은 더더욱요. 그렇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어쩌면 저는 그저 이유가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공학이라는 어려운 학문 앞에서 부족함에 좌절하지 않고 계속 부딪쳐 나가며 제가 욕심내는 기준까지 성장해야 할 이유를요. 이제는 즐거운 마음으로 공학을 배워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성장할수록 보다 제대로 된 가치를 자신 있게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테니까요. 한 명 혹은 여러 명의 사람들의 눈앞에서 직접 기술의 혜택을 전할 수 있는 공학자가 될 수 있을 때까지, 느리더라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 보려 합니다.


※ 이 글은 영상으로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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