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

2020.08.21

by 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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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는 3개월, 길게는 반년 동안 해왔던 연구주제를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과가 잘 안 나와서가 아닙니다. 애초에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이유인데, 이게 아쉬운 점은 처음부터 그것을 알았다면 여기까지 끌고 오지 않아도 됐을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연구는 다른 여타 일들과 마찬가지로 노력만으로 되는 부분이 아닙니다. 특히나 저같이 연구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면 주제가 연구적으로 해볼 만한 건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죠. 그렇기 때문에 연구실 선배들이, 지도교수의 조언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동안 저는 나름의 연구주제를 잡고, 그 주제를 검증해 보기 위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해왔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불안 요소는 지도교수와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기가 굉장히 어려웠다는 점입니다. 신입생들이 연구주제를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은 입학 후 6개월이 지난 후부터였고, 개별 면담도 따로 진행되지 않기에 저는 연구실 선배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연구실 선배들은 모두 설득할 수 있었고요.


물론 지도교수와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을 안 했던 것은 아닙니다. 면담 일자를 잡고자 했거나, 현재 진행 중인 상황을 발표자료로 정리해서 메일을 보내기도 했어요. 그 덕에 간단한 메일 회신 외에도 총 3번의 미팅을 해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확실하게 '진행해보자', '진행하지 말자'는 등의 방향 제시를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처음에 이 연구 주제를 잡게 된 것도, 학기 초에 어쩌다 진행된 개인 면담에서 제가 던진 아이디어에 지도교수가 좋은 반응을 보여서였어요. 그렇지만 같은 단어에 대해 서로가 생각하는 그림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이후의 면담 중에는 해당 연구를 '진행하지 말자'는 뉘앙스의 얘기도 분명히 들었고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뉘앙스였고, 제가 제시했던 주제와 관련된 얘기도 함께 들었기 때문에 '아직 내가 준비한 게 부족해서 그런 걸까?'라는 생각을 했던 저는 주제에 관련된 피드백만 선택해서 받아들이게 된 거죠.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수 있어요. 제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서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틀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늦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다 확실한 반복적인 소통이 이루어졌다면 현재 상황을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 아니, 좌절감이 듭니다. 일찍이 그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제 자신이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요.


그래도 이미 일은 벌어졌습니다. 발생한 현상에 대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나가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결과가 좋지 않다면 저의 능력 부족을 탓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했던 저였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의 상황에서 마음이 크게 흔들리지는 않습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크게 피로하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라는 아주 약간의 안도감도 듭니다. 몇 년 단위의 너무나도 긴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고, 지도교수가 원하는 바를 비교적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더불어 현재 참여하고 있는 국가과제로도 연구를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아, 오히려 해야 할 일은 절반으로 줄어든 셈이니 얻는 것이 아주 없지는 않은 상황인 거죠


故 신해철 선생님께서는 어떤 강연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공이 우리에게 담기는 것은 순전히 운이다. 우리는 성공을 담는 그릇만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공이 담기지 않더라도 그릇은 그 자체로의 가치를 지닌다. 우리가 고려청자에 음식이 담기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가치 없다고 말하지는 않지 않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멋진 그릇을 빚는 일이다. 성공이 담길 수 있는 순간이 왔을 때, 그릇에 가장 멋진 모습으로 담을 수 있도록.



분명 힘든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랜 노력이 물거품이 된 거죠. 그래도 괜찮습니다. 저는 제 그릇을 최선을 다해 빚어 가고 있으니까요. 저는 진심으로 성공이 제 그릇에 담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건 제 노력의 영역이 아니니까요. 그저 꿋꿋하게 그릇을 빚어가고 그 가치를 제가 지켜 내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걱정해 주시고 응원해 주셨는데,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동시에 저는 진심으로 괜찮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 이 시간도 언젠가 분명 지나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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