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파악
미국에서 자기 확신을 강하게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학회에서 만난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자신이 한 연구가 분명한 의미가 있다는 뉘앙스로 말했거든요. 하지만 그렇다고 가장 중요한 발견이거나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했다는 과장은 없었습니다. 그들의 연구가 가진 한계점 또한 솔직하게 말했고요. 한 연구원분께서는 대학교 때 연구에 소질이 없다고 느껴 바로 회사에 갔고, 학회에서 여러 연구들을 보았어도 마음이 달라지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분들은 모두 중심이 확고했달까요. 각자가 가진 이유 있는 단호함으로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 꽤나 솔직했습니다. 신기한 건 그럼에도 자신 있고 만족스러워 보였어요.
어떻게 해야 그런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아무래도 스스로 주제파악을 하는 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 확신을 가지려면 무엇을 아는지 알아야 하니, 자기 확신을 가지려면 자기 주제 파악을 먼저 해야 할 겁니다. 그런데 주제 파악은 생각보다 괴로워요. 스스로의 가능성과 장점은 물론이고 한계와 단점도 바라보아야 하니까요.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은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스스로의 주제를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은,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이미 결정된 것들이 많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앞으로 새로운 것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적다는 말이기도 하죠.
저에게는 달콤한 가능성을 자기 확신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웠어요. 경험들을 통해 단순히 스스로를 아는 것과 달리, 특정 부분에 대해 확신을 갖는 것에는 더 많은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일종의 선언이 필요했어요. 가능성을 닫겠다는 선언 말이죠. 그중 하나가 연구였습니다. 타고난 기질과 경험을 통해 연구가 그다지 적절한 길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라고 확신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확신하지 않았습니다. 욕심이 많았거든요. 욕심이 많아서 포기하기보다는 외면하기를 택했고, 그래서 쌓인 경험이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터져 나올 때까지 시간이 좀 더 걸렸습니다. 물론 그 과정과 결과도 나쁘진 않았습니다만, 자신 있거나 만족스럽지는 않았어요.
자기 확신을 통해 스스로만 자신 있고 만족해도 괜찮을까요? 그래도 잘 살 수 있을까요? 당연합니다. 왜 스스로가 확신을 가지면 안 되죠? 그렇게 살아도 아무 문제없습니다. 미국에서 개인적으로 동경했던 박사님을 직접 만나 뵙는 행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처음부터 뚜렷한 목표를 갖고 계신 건 아니었더라고요. 그저 무엇인가 만드는 게 좋았을 뿐이고, 만드는 걸 찾다 보니 그것이 연구였을 뿐이며, 연구를 하다 보니 박사까지 받게 되셨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날씨 좋은 캘리포니아에 정착하고 싶었고, 제대로 된 품질 높은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 회사에 오게 되셨다고 했고요. 다만 그분은 확신을 갖고 계셨습니다. 나의 어떤 면은 이렇고, 어떤 면은 이렇지 않은 사람이라는 확신 말이죠.
어쩌면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능성이 줄어들면 더 많은 곳에 잘 쓰이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요. 그런데 자기 확신을 가진다고 해도 세상에 잘 쓰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애매한 것보다 더 잘 쓰일 수 있을 거예요. 반드시 남들보다 잘할 필요는 없습니다. 남들이 하지 않은 특별한 것이어도 충분합니다. 유명한 연구실에서 학위과정을 밟고 계신 한 연구원님은, 해당 분야를 특출 나게 잘해서가 아니라 그 연구실이 필요로 하는 분야의 경험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선발되었다 하셨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탁월함이 아닌 다름으로 뚫어내신 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확신이 필요합니다. 확신을 가지고 버릴 건 버려야 특별해질 수 있어요.
인생은 정말 스스로를 알아가는 여정의 연속입니다. 누군가에겐 그 여정이 지독할 수도, 누군가에겐 꽤나 심심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무엇이든지 될 수 없습니다. 뜨거우면서 차갑고, 밝으면서 어두울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니 이제는 제 자신을 직시하려 합니다. 자기 확신을 갖고 스스로를 조금씩 정리해나가려고 해요. 할 수 있는 건 보다 자신 있게, 할 수 없는 건 보다 과감하게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삶을 보다 단단히 만들고 싶다면, 가능성을 버리더라도 제 모습에 확신을 가져야 할 것 같거든요. 그래야 더 큰 자신감과 편안함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는 지독한 가능성들을 포기해야 할 때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