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의 학회 참석
생애 처음으로 학회에 참가했습니다. 그것도 미국에서요. 석사 졸업 주제로 작성한 논문이 국제 저널에 게재되었고, 해당 저널과 연계된 학회에 초청을 받아 포스터를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는 업무와는 간접적으로 밖에 엮여있지 않아 출장 처리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감사하게도 사측에서 귀한 시간과 비용 사용을 허락해 주셨어요. 그래서 학회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기술 개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만한 연구나 동향을 가능한 많이 발굴하고 싶었거든요.
어느덧 3년 차 회사원이 되어 제품을 만드는 관점이 더 익숙해져서 그런지, 과학적인 발견에 집중하는 연구들이 굉장히 신선하고 재밌었습니다. 특히나 기계공학을 배경으로, 하나의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물리적인 시스템을 만드는데 최소 4년부터 7년까지 시간을 쏟은 연구들이 경이로웠어요. 아마 대학원생이었다면 그 수준에 위축되느라 이렇게까지 즐겁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학회에 소개된 내용들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가장 즐거웠던 건 네트워킹을 통해 연구자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거였습니다. 네. 저는 이곳에서도 사람을 쫓고 있었어요.
이번 학회는 박사학위 소지자나 교수들의 비중이 특히 높았고, 학계에 처음 접근하는 사람보다 기존 구성원들이 더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개최 지역인 롱비치가 비용적으로 부담이 커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런 상황이 더욱 반갑더라고요. 평소 논문과 인터넷으로만 보던 유명한 저자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크게 많아졌으니까요. 실제로 이름을 알고 있었고 학회에 참석하셨던 모든 교수님들과는 한 번씩 이야기를 나누어보았습니다. 영광이고 신기하고 가슴이 벅찼어요. 아마 연예인과 단독으로 팬미팅하는 팬의 기분이 딱 그랬을 겁니다.
교수님들께는 회사 생활을 하며 생긴 궁금증에 대해 많이 여쭤봤습니다. ‘학계와 산업계의 격차는 왜 벌어지는 것이고, 산업에서 어떻게 해야 그 격차를 메꿀 수 있는지’가 질문의 요지였어요. 기술적인 답변을 들을 수도 있었고, 보다 본질적인 답변을 들을 수도 있었습니다. 한 교수님께서는 애초에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하셨어요. 학계와 산업계는 아예 다른 영역이라면서 말이죠. 산업은 새로운 기술이 아니라 필요한 제품을 만들어야 하고, 아무리 독창적이고 뛰어난 기술이라도 시장의 논리에 맞지 않는다면 쓸모없다고 답변해 주셨습니다. 기술 창업 후에 여러 회사를 매각하셨고, 학계에서도 엄청난 권위를 갖고 계신 교수님의 답변이어서 더욱 인상 깊었습니다. 여담으로 성격까지 좋으시더라고요. 정말 완벽에 가까우신 듯했어요.
그래서 그런가 산업에 남을 거라면 박사 학위는 선택적이라는 의견이 보다 와닿았습니다. 학회에서 처음 만난 외국인 박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요. 박사님께서는 회사에서 성공하기 위한 무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박사 학위는 그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사실과 학위 과정의 많은 어려움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저 연구가 하고 싶었기 때문에 과정을 견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학위 과정과 함께 어린아이들도 키우셨어서 더욱 험난했음이 분명했습니다. 앞으로 회사에서 보다 잘 해내고 싶다면 대학원이 아닌 다른 방식도 고민해 봐야겠다 느꼈습니다. 물론 박사 과정을 통해 연구를 해본 경험은 굉장히 큰 자산이자 무기입니다. 이건 많은 연구자들과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더욱 명확해졌어요.
처음 만나 뵌 분들 중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해 주신 분은 한국인 교수님이셨습니다. 학부 연구참여 때 지도교수님의 졸업생이신 선배님과의 대화가 정말 즐거웠어요. 많은 걸 알아가기엔 짧은 시간이었지만 성격의 결이 비슷하다 느꼈고, 제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연구적인 관점에서 여러 가지 조언도 주셔서 참 즐거웠습니다. 덕분에 학회에서만 알 수 있는, 회사가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유의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언젠가 혹시라도 박사를 하게 되면 어떤 주제로 어떤 교수님을 컨택해 보면 좋을지도 훨씬 더 명확해졌어요.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칭찬도 아끼지 않아주셨다 보니 어쩌면 박사가 할만할지도 모르겠다는 뜬금없는 자신감은 덤이었습니다.
학회가 끝나고서는 샌프란시스코로 넘어가 연구자 몇 분을 더 만나 뵐 수 있었습니다. 원래 알고 지내던 분들도 계셨고, 콜드 메일로 무턱대고 연락드린 분들도 계셨어요. 바쁘신 와중이실 텐데도 선뜻 귀한 시간을 내주신 게 참 감사했습니다. 커리어와 가족에 대한 조언을 많이 들을 수 있었고, 회사가 꼭 필요로 했던 몇 가지 정보들도 예상치 못하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신기했던 건 한 박사님께서 해주신 말씀이었어요. 보통 제가 보낸 것과 같이 모르는 사람에게 오는 요청 메일은 무시해 버린다 하셨습니다. 그분께 메일로써 처음으로 연락드려 만나 뵌 제가 굉장히 특이한 경우더라고요. 이유를 여쭤보니, ‘이렇게까지 메일을 썼는데도 나를 안 만나주면 당신은 나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느낌이어서 그랬다고 하셨습니다. 웃기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무례할 수도 있는 메일을 그렇게 받아주시고 시간까지 내주셔서 참 감사했어요.
저의 생애 첫 학회는 감사하게도 이렇게 수많은 분들의 시간과 도움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학계 최전선의 연구를 배운 것은 물론이고, 연구라는 행위에 진심인 사람들과 같은 시공간에서 함께할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스스로가 좋은 방향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는 여러 직간접적인 피드백들을 받아 자신감도 많이 생겼어요. 꽤나 잘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얻음과 동시에, 꽤나 갈길이 멀다는 건강한 자극을 받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참 멋진 사람들이 많네요. 저도 그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잘 살아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