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석사 과정을 꽤 훌륭하게 마무리했음에도 박사에 진학하지 않았었습니다. 그 이유는 박사가 되면 갖게 될 것을 추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박사 과정을 경험하는 것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지식이라는 무지 속에서 자신만의 답을 찾아 나가야만 하는 탐험가로서의 준비라 생각했어요. 만약 그걸 평생의 업으로 삼는다면 무엇인가 모르는 상황을 끊임없이 반복해 마주해야 하는 것이었죠. 저는 무엇인가 잘 모르는 상황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답이 있는 문제를 풀거나 틀이 주어진 일을 해결하는 것, 특히 문제를 마주했을 때 어떻게 해야겠다는 감이 이미 있는 상황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박사 과정에 진학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몰랐던 것을 새롭게 제안하는 것이 연구의 본질이니까요. 연구는 알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이 확실한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으니까요.
그래서 졸업 후에 회사에 왔습니다. 제 생각에 회사에서의 공학자는 이미 알려진 지식들을 잘 사용하기만 해도 괜찮다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얼마나 새로운 걸 시도하는지가 문제라기보다는, 알고 있는 것을 상품에 얼마나 잘 녹여내는지가 중요하다 느꼈습니다. 실제로 지난 3년간의 경험은 그러했습니다. 일을 하는 것,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기술을 적용하는 것에서 크게 새로울 것은 없었습니다. 그저 어떤 기술을 적용해야 하는가, 풀어야 하는 문제가 무엇인가에만 집중하면 되었어요. 연구보다 훨씬 더 편하고 즐거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과 이미 알려진 것들에서 시작하면 되었으니까요. 이런 종류의 문제는 언젠가 무조건 풀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끔 시간이 걸리더라도 연구처럼 괴롭거나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일을 하는 것 자체가 큰 문제는 아니었던 거죠.
하지만 다른 곳에서 문제가 터졌습니다. 저는 현재 새롭게 시작하는 팀의 창립 멤버로 3년째 일하고 있는데, 새로운 제품과 비즈니스에 도전하는 팀의 특성상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정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제야 생각하는 거지만, 회사 안에서 무슨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이 연구를 처음 시작하는 과정과 정말 비슷하더라고요. 진로를 고민할 때 이미 직감하고 있었던 부분이지만, 대학원 때는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회사에서는 괜찮을 것 같았어요. 지식이라는 다소 추상적이고 현학적인 것이 아니라 제품과 비즈니스라는 현실과 가까운 문제를 풀어야 하고, 직급과 직책이 높은 사람들과 함께 하니까 그다지 힘들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팀원들이 많아지고, 각자의 능력치와 경험이 다르고, 시간이 지날 때마다 상황이 바뀌고, 소통이 어려워지고, 정보량이 많아지면서 점차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팀 안의 모두와 소통하고 모든 정보를 안다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무슨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 회사에서도 팀에서도 답을 줄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었습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올해 초부터 인지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왔습니다. 일이 진행되지 않는 것도 답답했지만, 그보다 답답했던 것은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풀어낼 수 있을지 실마리조차도 모르겠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유는 대학원때와 비슷했으나 그 스트레스는 훨씬 더 컸습니다. 왜냐하면 무슨 문제를 풀어야 할지에 대한 답을 구하기가 훨씬 더 쉬운 상황처럼 보였거든요. 지금은 지식이라는 무한대 차원에서 답을 구하는 연구와 같은 활동이 아니었습니다. 제 위로 몇 단계나 높은 직급과 직책을 가진 사람들, 더 많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훨씬 많았고 그들도 답을 제안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대학원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었고, 나름의 합리적인 답을 내고 있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이렇듯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정하기 위한 자원이 대학원 때 보다 훨씬 풍부하다 느꼈음에도 계속 명확한 답이 나오고 있지 않았어요.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결정을 누가 하는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답이 매 순간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정보만 쌓일 뿐,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어요. 성취가 없는 상황이, 앎이 없이 무지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 너무나도 답답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더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어요.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나아진다는 것을 믿고 있기에 납득하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힘을 주었습니다. 스스로를 몰아붙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기도 했어요. 화를 내기도 하고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환경의 문제인지 개인의 문제인지 여러 방면으로 고민해보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뿐이었습니다. 답을 찾기 위한 할 수 있는 모든 발악을 해보았으나 에너지는 바닥나고 스트레스만 늘어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제가 힘든 건 결국 답을 모르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답이라는 게 존재할까요? 지금 이 순간도, 연구를 시작했던 대학원에서의 시간도, 심지어 태어난 순간에도 답이라는 건 없었습니다. 그게 당연한 거였는데, 시간이 지나 경험과 행운이 겹치면서 무엇인가를 아는 상황이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한다고, 그것이 정상이고 당연하게 이뤄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아는 상황이 비정상이었습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의 상태가 기본이고 정상이었어요. 삶에 정답이 없다는 말을 넘어서, 세상에 정답이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원래 그런 것이었어요. 최선을 다해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무력함에 대한 합리화가 아니라, 모르는 것이 기본이기에 더 겸손하고 겸허하게 끊임없이 답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알아도 그건 순간의 임시 답안일 뿐입니다. 모든 것을 알 수도, 아는 것이 영원히 지속될 수도 없습니다. 무한하게도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 세상의 일부는 아무리 좁은 범위라도 완벽하게 알 수 없습니다. 애초에 저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에요. 아니,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렇기에 제가 할 수 있는 건 답을 구하는 것 말고는 없었어요. 그것도 영원하지 않은 찰나의 답을 말이에요. 그 답이 정말로 유효한 것인지, 언제까지 유효할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영원히 무지 속에서 순간의 답을 찾아야 하는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과거에는 그러지 않았죠. 시험이나 스스로에 대한 탐구는 최선을 다해 애쓴다면 답을 구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답을 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단순했거나 운이 좋았을 뿐이었습니다. 세상의 복잡함을 가진 대학원에서의 연구와 지금의 혼란은 아무리 애써도 답을 구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어요. 무엇인가를 해낸다는 것은 정답을 찾은 게 아니었습니다. 해냈거나 탁월하다 느꼈던 모든 것들은 그저 운이 좋았던 것뿐이었습니다.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내린 답이 운 좋게 그 순간에 많은 부분 들어맞았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성공은 순전히 운이었던 것이고, 혹시라도 성취를 느꼈다면 충분히 감사해야만 했던 것이었습니다.
아, 이제야 왜 죽을 때까지 노력해야 하는지가 마음에 와닿네요. 이 무지의 괴로움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영원히 알 수 없습니다. 잠시 알았거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거나, 알지 못하는 상황을 그대로 마주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노력하고 애쓰는 만큼 답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답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전제해야만 하니까요. 답을 쉽게 구할 수 없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애초에 답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요. 그러니 순간순간의 임시 답안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답을 마주하거나 떠나보내는 시기를 온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걸 이해하는 것이, 그렇기에 언제든지 틀릴 수 있고 모를 수 있다는 사실을 온 마음을 다해 받아들이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삶은 박사과정과 비슷한 걸까요. 무지의 상태에서 어떻게든 하찮은 답이라도 구해야만 했던 연구가 싫어 회사를 선택했지만, 본질적으로 이곳에서 상품을 만들고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 던져야만 하는 질문들은 연구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씁쓸한 웃음이 나옵니다. 이럴 거면 지식이라는 변수만 고민하면 됐을 박사 과정이 더 유의미한 트레이닝이 아니었을까요? 모든 것을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지금의 팀이 아니었다면 이보다는 쉽지 않았을까요?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답을 구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제 욕심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힘들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요? 왜 저는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걸까요?
실컷 원망하고 나서야 후련한 속을 마주합니다. 많이 씁쓸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속이 시원해요. 이제야 정말로 6개월 가까이 저를 지독하게 괴롭혀온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되었으니까요. 삶은 원래 그런 것이었습니다.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기본인, 그렇기에 평생을 구도자처럼 언제 사라질지 조차 모름에도 미숙한 답이라도 찾고자 이리저리 방황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조급해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좀 더 편안하게 앞으로의 고뇌들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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