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역사 - 당신이 몰랐던 동유럽의 대국>을 읽고
박물관의 2024 기획전 <스페로, 스페라무스!>(나는 희망한다, 우리는 희망한다!)는 6월부터 11월까지 6개월간 매월 한 나라의 축제를 선정해 알아보고 즐겨보고자 준비중이다.
6월 그 첫 국가로 폴란드를, 그 첫 축제로 <라이코닉>을 선정했다.
라이코닉은 13세기 폴란드를 침략한 몽골군을 물리친 일화를 바탕으로
우스꽝스러운 행색으로 말을탄 탄 몽골군으로 분장을 해 희화화하는 독특한 축제다.
폴란드의 축제를 소개하니 자연히 폴란드가 궁금해진다.
폴란드의 역사와 관련해서는 <8분 만에 알아보는 폴란드 역사>라는 애니메이션을 자주 본다.
(자막까지 친절하게 나온 버전이 있어 링크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찬찬히 폴란드 역사를 살펴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책을 검색했는데 폴란드 관련책은 많지 않았다.
고심 끝에 선택한 책은 <폴란드 역사-당신이 몰랐던 동유럽의 대국>.
다른 책이 에피소드 위주라면 이 책은 폴란드 역사를 순서 대로 다룬 부분이 맘에 들어 선택했다.
폴란드 역사에 대한 개괄서로는 좋은데 읽으면서 드는 아쉬움은 분량이 적다 보니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이름만 언급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또 아무래도 일본인 교수가 쓰다 보니 일본과 폴란드 관계에 대한 설명이 많은데
책 분량이 많지도 않은데 그런 부분이 많이 할애된 측면이 있었다.
일본어를 한국어로 번역해 읽어야 하는 폴란드 역사라 표현이 조금씩 다른 느낌도 있었지만
궁금한 폴란드 역사를 한 번 훑기에는 괜찮았다.
첫 주석과 작가의 서문이 폴란드 역사에 대한 요약으로 훌륭했다.
옮긴이의 주석.
'폴란드 공화국(Rzeczpospolita Polska),통칭 폴란드는 중앙 유럽에 위치하는 공화국으로 유럽연합(EU)와 나토(NATO)가맹국이며 수도는 바르샤바이다. 면적 약 31만 ㎢가 조금 넘고 인구는 약 3,784만 명이다. 폴란드의 국명인 '폴스카'는 초원을 의미하는 '포오레'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폴란드는 '분할과 통합'이 반복되는 역사를 걸어왔다. 10세기경에 국가로 인정이 되었고 16~17세기에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을 형성하여 유럽에서 손꼽히는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18세기에는 세 번에 걸쳐 외국에게 분활된 끝에 소멸하여 그후 123년간 외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에 독립을 회복하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소련에 의해 침략을 당해 다시 분할되었다(=폴란드 침공), 1952년 폴란드인민공화국으로 주권을 회복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소련의 위성국가였다. 1989년 민주화 과정을 통해 현재의 폴란드 공화국이 되었다. '.
비슷한 내용이지만 작가의 서문도 보자.
'폴란드는 비극적인 역사를 가진 곳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에 의한 삼국 분할의 결과 1795년부터 1918년까지 123년 동안 독립을 상실하였다. 독립을 회복하여 자유를 구가한 것도 잠시,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에 의해 조국이 분단되어 그야말로 고난의 역사를 걸어가게 되었다. 아우슈비츠의 비극도 이 시대에 일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다시 독립국이 되었으나 소련의 간접 통치가 반세기 이상 이어졌다. 이처럼 폴란드의 비운은 그 지정학적 위치 및 지리적 형상에서 비롯되었다. 즉 자연 요새라 할 만한 것이 없는 평탄한 국토에 초강대국에 둘러싸인 지리적 상황이 국토의 유린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
농경민 위주의 나라였던 폴란드는 996년 미에슈코가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기독교의 수용에는 미에슈코가 돈부르흐카라는 보헤미아 여성에게 청혼하기 위한 것이라는 배경이 있다. 미에슈코 1세의 아들 볼레스와프 1세 (용감한 공작, 재위 992~1025)는 1000년에 그니에즈노에 대주교좌를 두고, 폴란드가 독립된 교회 조직을 갖출 의사를 표명하며 나라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폴란드는 독일기사단과 오래 싸워야 했는데 13세기 폴란드 최대의 위협이 독일기사단이라고 할 정도였다. 독일기사단은 1190년 제3차 십자군원정 때 창설되어 폴란드를 압박했다. 1343년에는 독일기사단에게 그단스크와 포모제 지역을 빼았겼다.
카지미에시3세(대왕, 재위 1333~70) 시기 독일기사단에게 이런 치욕을 당하긴 했지만 카지미에시 대왕은 1364년 크라쿠프 대학을 창립했고 26개의 도시에 장벽을 설치하고 51개의 성을 축성해 외세의 침략에 대비했다.
이 시기 수도였던 크라쿠프는 크게 발전해서 1596년에 바르샤바로 천도하기까지 수도(왕의 대관식은 계속해서 크라쿠프에서 거행되었다)였으며 기계, 금속, 화학, 식품, 인쇄 등 여러 산업이 번성하며 동시에 큰 문화도시로 명성을 떨쳤다.
카지미에시 대왕의 서거 이후 남자 계승자가 없었던 피아스트 왕조는 헝가리 왕 라요슈 대왕(루드비크)에게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웃긴 루드비크는 장녀 마리아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중소귀족(슐라흐타)에게 온갖 특권을 안겨주었고 결국루드비크 사후 차녀 야드비가가 1384년 11살의 나이에 왕위(폴란드 최초의 여왕)에 즉위했고 남편이 브와디스와프 2세로 즉위했다.
(남자 계승자가 없어 친척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그 친척은 온갖 손해를 보고 결국에는 여자 계승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최초의 여왕까지 만들었다는 웃픈 이야기)
15세기에는 얀 드우고시라는 인물은 외교관으로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1467년 12권에 달하는 폴란드 연대기를 편찬했다.
1505년에는 국왕이 새로운 법률을 포고하려면 상하 양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내용의 니힐노비법을 통해 전국의회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폴란드의 큰 골치거리였던 기사단은 지그문트 1세 시기 폴란드와 싸워 패배하고 루터파로 개종했으면 마침내 1525년 4월 10일 크라쿠프 광장에서 초대 프로이센공 알브레히트 호엔촐레른이 지그문트 1세 앞에 무릎을 꿇고 신하로 복종하겠다는 서약을 하게 된다.
1537년 지그문트 1세 스타리(재위 1506~48)시기 중소귀족 슐라흐타들은 원로원을 우대하는 왕에게 불만이 있던 차에 몰다비아 원정을 앞두고 슐라흐타 총동원령을 내리자 르비우(현재 우크라이나 서부 도시)에 집결해 왕의 독재적 결정해 항의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 결집한 슐라흐타들이 오랜 기간 닭고기를 엄청나게 소비해서 이때의 항거를 '닭전쟁'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지그문트 1세는 이탈리아에서 다양한 분야의 많은 사람들을 초빙해 폴란드 문화를 융성시킨 공이 크다. 토룬 출신의 천문학자 미코와이 코페르니크(라틴어명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로 널리 알려져 있다)는 1543년에 출판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지동설을 주장했다.
폴란드는 심지어 1569년 리투아니아와의 연합으로 유럽 역사상 최대 국가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폴란드에 의한 리투아니아 병합의 성격을 띤 이 공화국은 선거로 꼽힌 한 명의 군주, 원로원, 합동의회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렇게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면적 약 81만 5천 ㎢, 인구 약 750만의 대국이 되었다.
하지만 지그문트 2세의 서거로 후계자가 마땅치 않았고 폴란드에서는 유력 휴보가 없어 합스부르크 대공 에른스트, 모스크바 대공 이반 4세, 스웨덴 국왕 요한 3세, 앙주 공 앙리 드 발루아 등이 후보에 올랐다. 결과 프랑스의 앙리 드 발루아가 선출되어 헨리크 발레지로 즉위하였다. (재위 1573~74) 하지만 헨리크는 5개월 뒤 형인 샤를 9세의 서거 소식을 듣자 야밤을 틈타 폴란드를 떠나 프랑스 국왕 앙리 3세로 즉위하였다.
이후 지그문트 2세의 여동생 안나가 폴란드 두 번째 여성 국왕이 된다. (재위 1575년). 안나는 헨리크 발레지와 결혼할 예정이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고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이슈트반(폴란드 이름은 스테판 바토리)이 남편이 되어 폴란드 왕으로 즉위하였다.
1601년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가 이끄는 폴란드군은 스몰렌스크를 포위하였다. 러시아-스웨덴 합동군이 원군으로 파견되자 이들과 대결하였고, 같은 해 7월 크로스노(폴란드명은 쿠우신)근교에서 7천 명의 폴란드군은 3만 5천 명의 적군과 대치하였다. 주키에프스키는 우선 러시아군을 물리치고 이어서 스웨덴군을 격퇴하였다. 일련의 승리 후 주키에프스키는 모스크바를 점령하였고 이 점령은 1612년까지 이어졌다.
1733년에 아우구스트 2세가 서거하자 다수의 슐라흐타들이 다시 레슈친스키를 국왕으로 추대하였다(재위 1733~36). 그러나 레슈친스키에 적대하는 세력은 전 왕인 아우구스트 2세의 아들을 국왕으로 추대하였다(아우구스트 3세, 재위 1733~63). 이 내분은 여러 외국까지 합세하여 국제 전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폴란드계승전쟁 1733~35). 결국 레슈친스키는 왕위를 포기하고 1736년 아우구스트 3세가 정식으로 왕위를 인정받았다.
아우구스트 3세 (재위 1733~63)가 서거하자 차르토리스키 가문(리투아니아 출신의 유력 귀족)이 왕위 계승에 개입해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 2세의 총신인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재위 1764~95)가 국왕 선거에서 선출되었고 결국 폴란드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세력이 약할 대로 약해진 폴란드를 두고 1772년 8월 5일 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 대표들에 의해 제1차 폴란드분할에 관한 조인이 이루어졌다. 러시아는 9만2천㎢의 영토와 130만 명의 주민, 프로이센은 3만 6천 ㎢의 영토와 58만의 주민, 오스트리아는 8만3천㎢의 영토와 265만 명의 주민을 얻었다
1795년 10월 24일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는 폴란드분할을 결정하였다.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는 퇴위하였고 이렇게 폴란드는 유럽의 지도에서 사라졌다.
국가가 사라지자 폴란드인들은 미국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도 하고 프랑스군과 이탈리아 군에 편입되기도 했다. 프랑스군에 편입된 폴란드 부대는 다음 해인 1802년 나폴레옹에 의해 생도맹그섬(아이티)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봉기의 진압을 맡았다(이때 나폴레옹군의 시도는 실패하고 아이티는 2년 후에 독립하였다). 풍토병이 만연하는 곳에서 싸웠던 다수의 폴란드 병사들이 목숨을 잃어 약 6천 명의 파견군 중 생존자는 3백 명 정도였다고 한다.
반면 1797년에 이탈리아에서 폴란드 군단이 조직되었을 때 그곳에 있던 유제프 비비키 중위는 <이탈리아의 폴란드 군단의 노래>를 작사하였다. 작곡자 불명의 민요 멜로디에 가사를 붙인 이 노래는 병사들의 사기를 진장시켰고, 바르샤바 공국이 중요한 행사 때마다 불리며 전해왔다. 1927년 이후 <동브로스프스키의 마주르카>로 폴란드 국가가 되었는데 가사는 다음과 같다.
폴란드는 아직 죽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이방인에 빼앗긴 것을
칼로 되찾으리
나가자 나가자 동브로스프스키
이탈리아의 땅에서 폴란드로
당신의 지휘 아래
동포와 하나가 되리
폴란드 망명객들은 망명지에서 조국 부흥을 위한 운동을 시작하였다. '오델 란베르파'는 그중 하나로 센강 중부 생루이섬의 란베르관을 활동의 거점으로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심인물은 아담 예지 차르토리스키로 외국 정부에 호소하여 그 압력으로 폴란드의 재생을 달성하려는 단체였다.
1846년 2월 20일 크라쿠프에서 가두 투쟁이 일어났고 이틀 후인 22일 얀 티스프스키 루드비크 고슈코프스키들은 국민 정부의 수립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크라쿠프 봉기는 실패로 끝났는데 오스트리아 정부가 지주에 대한 농민의 반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농민들에게 봉기군에 맞서 일어난다면 포상을 하겠다고 약속하였고 농민들은 2월 18일 행동에 나섰고 수 백 명의 지주가 살해당했다.
폴란드를 빛낸 인물로 빠질 수 없는 이가 음악가 쇼팽이다.
쇼팽은 음악가로 명성을 날렸지만 이렇게 탄식했다.
'아, 그녀(쇼팽의 첫사랑 콘스탄챠 그와드코프스카)나 언니나 여동생조차도
비록 붕대, 삼각 붕대를 꿰매서라도 도우려고 애쓰는데
나는 부모님께 짐만 되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지만 갈 수가 없네.
살롱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앉아 있지만
집에 가면 피아노에 화풀이하고 있다네. '
1918년 11월 7일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나흘 후인 11월 11일 제1차 대전이 종료되어 폴란드는 123년 만에 독립을 회복하였다.
1920년 5월 7일 폴란드군은 키예프(우크라이나의 도시)를 점령하였으나 소비에트의 반격을 받아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 원수는 철수를 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7월 30일 폴란드인 공사주의자들은 비아위스토크에서 폴란드임시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폴란드군은 교전 끝에 8월 바르샤바 근교에서 소비에트군의 진군을 저지하였다. ('비스와의 기적'이라 불림)
지리적 위치는 폴란드를 가만두지 않았다. 폴란드 외교의 기본은 프랑스와의 동맹 관계가 우선이었으나 독일과 소련 양 대국 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유지한다는 자세로 전환하였다. 1932년에 소련과, 1934년에는 독일 (히틀러가 1933년 수상에 취임)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폴란드의 고난은 그치지 않았다.
1939년 9월 17일 소련군이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인의 보호를 이유로 동쪽에서 폴란드 국경을 넘어왔다. 소련군의 폴란드 침공은 사전에 독일의 양해를 얻은 사항이었다. 대전 발발 일주일 전인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독일 외상 리벤트로프와 소련 외상 바체슬라프 몰로토프는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비밀 의정서로 폴란드분할을 결정하였다. 재건된 폴란드는 불과 20년 만에 다시 유럽의 지도에서 모습을 감췄다.
나치 독일의 정책은 폴란드인을 단순한 노예노동 담당자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지식계급이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총독관구에서는 중등교육 이상의 교육기관은 폐쇄되었다. 대량 체포와 처형이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고 점령자들은 피점령자를 독일로 강제 노동을 보냈다.
유대인을 격리시키기 위해 사방을 콘크리트로 된 높은 담장으로 에워싼 게토가 폴란드에만 약 4백 개가 만들어졌다. (1941년에는 약 45만 명을 수용). 50만 명이 게토에서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폴란드군은 소련과 거리를 두었다. 소련 주둔 폴란드 병사들이 비참한 상황이므로 이란으로 일시 철수시켜 그곳에서 요양하여 태세를 정비한 뒤 연합군의 병력으로 공헌시키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스탈린은 좋을 대로 하라고 답변하였다. (1942년 3월부터 이란으로 철수하여 나중에 서부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망명군과 합류하였다. 1944년 이탈리아의 몬테카지노 전투에서의 무훈은 유명하다. )
하지만 소련이 가만 있을리 없었다. 1943년 6월 9일~10일 모스크바에서 폴란드애국자동맹 제1회 대회가 열려 시코르스키 망명정권을 맹렬히 비난하며, 소련과의 동맹이 분별 있는 유일한 정치임을 확인하였다. 소련의 괴뢰정부 준비였던 것이다.
폴란드인들은 외부로는 소련과 싸우고 내부로는 나치 독일에 맞서 무장봉기를 계속했다.
1944년 2월 1일 바르샤바의 우야즈드프키에로 23번지에서 제2차 대전 중의 폴란드 저항운동 중에서도 특히 잘 알려진 쿠체라 (Franz Kutschera1904-1944)암살 사건이 일어났다. 쿠체라의 재임 중에 바르샤바에서는 33회에 걸쳐 대규모 처형이 이루어져 1,500명이 넘는 희생자가 나왔고 또 7천 명 이상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폴란드 국내군 총사령부는 2월 10일 차량추격적과 총격전을 벌여 암살했다..사건 다음 날인 2월 2일에 독일군은 보복으로 현장에서 좀 가까운 우야즈드프스케가 25번지에서 파뱌크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1백 명을 사살하고 바르샤바에 대해 1억 즈워티의 배상금을 부과하였다. 그 후에도 두 차례 독일군은 60여 명을 살해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폴란드는 소련의 위성국가가 된다.
암울한 시간을 보내던 폴란드에 경사가 있었으니 1978년 10월 16일 크라크푸 대주교인 카롤 보이티와가 로마교황으로 선출된 것이었다. 이탈리아인 이외의 추기경 중에서는 실로 455년 만의 일로 보이티와는 요한 바오로 2세로서 26년간 교황 직을 수행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 재임중에 종종 정부에 항거하는 시민들을 지지하였다.
1980년대에는 그단스크 레닌조선소의 레흐 바웬사가 노동운동을 벌였고
자주관리노조 '연대'를 결성하였다.
1983년 바웬사가 노벨평화상을 받으며 1989년의 민주화를 이끌어 냈다.
파란만장하고 기구한 역사를 따라가며 짧은 책을 짧게 요약하느라 빠진 부분이 더 많지만
폴란드 역사를 더 알아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