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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o Jun 12. 2024

프랑스혁명가들이 축제에 목맨 까닭

<축제의 정치사>를 읽고


올해 박물관 행사 <스페로, 스페라무스!>가 세계 6개국의 축제를 소개하는 것이어서 관심이 가는 제목이었다.


나는 당연히 일반적인 축제의 정치사에 대한 내용인 줄 알았다. 하지만 책에서 다룬 내용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축제의 정치사였다.

읽지 말까 하다가 그냥 넘겨보니 나름 재미가 있기도 해서 어쩌다 다 읽게 되었다.


책 제목이 <프랑스 대혁명 이후 축제의 정치사>라고 하면 더 정확할 것 같다.

내용은 상당히 미시적이며 논문 수준으로 역사적 사실들이 상세하게 나열되어 있다.

사실 책을 읽고 나서도 내가 제대로 책을 잘 읽은 것이 맞나 싶게 복잡한 프랑스의 상황들이 있지만

책 내용은 아주 충실한 편이고 많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져 있다.

책 내용을 요약하기에는 나의 프랑스 혁명사에 대한 이해가 얕아서 흥미로운 포인트 몇 가지만 짚어볼까 한다.


이 책의 핵심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왕정과 봉건적 체제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고

이 불만을 정치세력별로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해 축제를 활용했다는 데 있다.


축제가 무언가를 기념해 행사를 벌이는 것이라면, 그 '무언가'를 정하고 상징하는 데

사실은 많은 고도의 정치적 계산들이 있었기에 이 시기 축제는 그 자체로 정치적이었다.


작가는 '축제들은 대혁명기 정치문화의 실상을 파악하고 혁명적 이념이 확산되는 과정을 밝힐 수 있는 열쇠이다. 더 나아가 기념과 기억을 통해 하나의 집단 정체성이 형성되는 비밀을 드러내주는 무대이기도 하다.'며 이 시기 축제들의 정치적 의미를 읽어내고 있다. 


혁명초 축제는 카니발을 연상시키듯 체제를 전복했다는 환희와 현실적 폭력이 공존했다. 10월 궐기일이었던 10월 5일 여인들은 미늘창 끝에 살해된 사람들의 머리를 꽂고 행진했다. 여인과 어린이들이 많이 참여한 축제였다. 이 시기는 봉건적 억압을 타파하고 해방을 가져온 '혁명적 날'로서 즉흥적이고 자율적이었으며 파괴적 행위가 많았다. 


흥미로운 건 혁명 초기 축제성을 상징하던 것이 오월수였다. 오월수는 당시 귀족 저택의 바람개비를 떼어내거나 교회의 의자를 태우는 등의 의식이 끝난 뒤 해방과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심어지곤 했다. 이때의 오월수는 나무라기보다는 일직선 모양의 기둥이나 막대를 땅에 꽂아준 형태로 이 오월수에 지대 영수증이나 귀족의 장식들을 매달아 귀족에 대한 응징과 복수를 상징했다. 


1790년 7월 14일 파리 샹 드 마르스에서 열린 연명제는 대혁명초기 무기를 들고 모인 민중들의 자발적 모임으로 각 마을과 도시의 국민방위대가 축제의 주역이었다. 

이 연맹제는 대혁명 기간 국민통합의 이상을 가장 잘 구현한 축제로 평가되었다. (이 평가에 대한 반론도 많다.)

특히 축제를 위한 토목 공사가 지지부진하자 군인 4,200명을 동원했고 축제를 불과 며칠 앞둔 7월 8일까지 공사가 더뎌지자 25만 혹은 30만 명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손수레의 날들'이라는 전설을 탄생시켰다.

이 연맹제의 이념은  '왕과 의회, 국민의 통합'이었다.  하지만 이 통합은 불완전하고 일시적인 것이었다. 


불과 2년 후 열린 샤토비유(Châteauvieux) 축제와 시모노(Simonneau)  축제는 이런 입장 차이를 명확하게 해 주면서 축제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됐다. 

샤토비유 축제는 그 시작부터 문제가 있다. 1790년 장교와 병사의 신분 차이로 인한 부대 내 갈등과 장교들의 병사 급료 착복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던 프랑스 부대는 1790년 7월 14일 이후 이 문제가 더욱 악화되었다.

정규부대 소속 병사들이 급진적 경향을 띠면서 밀린 봉급의 지불을 요구하는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 문제로 8월 6일 낭시에 감찰사가 파견되었다. 낭시에는 세 개의 연대, 기병대와 왕의 부대, 그리고 스위스인으로 구성된 샤토비유 부대가 있었는데 의회는 부이에(Bouillé) 장군을 파견해 강경진압에 나섰다.

부이에 장군은 8월 16일 의회 법령 '24시간 내에 폭동을 진압하고 복종하지 않는 폭도들은 처벌하라"에 입각해 반란군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이 때문에 적극 가담자 23명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형되고 42명은 갤리선 노예형에 처해졌다.

이를 두고 왕과 국민의회, 입헌군주파는 부이에 장군을 지지했지만 민중협회는 반대했다.


부이에 지지파들은 1790년 9월 20일 샹 드 마르스에서 반란 진압 중 사망한 부이에 장군의 병사들을 추모하는 장례식을 개최했다. 

하지만 민중협회와 생 탕트완느 교외 주민 4,000여 명은 국민의회 앞에 모여 부이에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2년 후인 1792년, 의회는 갤리선에 노예로 억류된 샤토비유 군인 복권 문제로 분열됐고 근소한 차이로 석방이 결정됐다.

샤토비유 축제는 이때 해방된 샤토비유 군인을 환영하기 위해 1792년 4월 15일 파리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진 축제였다. 


시모노 축제는 얼마 후인 6월 3일 열린 축제다. 시모노는 이 해 3월 3일 곡식의 공정가격제를 요구하는 민중들에 의해 목숨을 잃은 에탕프의 시장으로 준법정신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샤토비유 축제에서는 군주를 비난하고 공화주의를 지향했으며 공화주의에 대한 상징이 가득했다. 


샤토비유 축제가 열리기 한 해 전이었던 1791년 6월 21일 국왕의 바렌느 도주 사건은 프랑스 민중운동을 공화주의로 급선회하게 만들었다.


프랑스에서는 1793년 8월 10일 <공화국의 통합과 불가분성을 위한 축제>가 개최된다. 다섯 개의 혁명적 장소를 거치면서 다섯 개의 혁명적 사건을 기념한 축제였다. 군주제의 몰락을 기념하는 이 축제 이후로 반군주주의 적인 분위기가 확산되었고 군주제의 흔적을 없애야 한다는 여론 또한 높아졌다.


축제 이틀 전인 8월 8일에는 역대 프랑스 왕들의 유해가 안치된 생 드니 수도원의 무덤이 파헤쳐져고 광장에 세워진 왕들의 조각상이 파괴되어 8월 8일과 9일에만 51개 왕의 기념비들이 파괴되었다.


이날 축제는 군주제의 몰락뿐 아니라 헌법을 공식적으로 공포함으로써 '헌법의 축제'로 불리기도 한다.


이 축제를 계기로 축제의 정치적 상징은 더 중요해진다.

하지만 이 지점부터 묘한 기류가 흐르는데 대혁명 이후 민중적 자율성과 즉흥성에 대한 두려움, 바꿔 말해 질서에 대한 강박관념이 혁명가들을 사로잡았다. 당국의 축제는 점점 민중의 자율성을 억압하고 계획성과 조직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8월 10일의 축제에 임하는 로베스피에르와 다비드의 최대 현안은 민중들의 급진적 운동을 가라앉히고 그들에게 헌법의 중요성과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이 축제 1년도 지나지 않아 축제의 영웅 에롤과 당통, 로베스피에르가 죽은 역사적 사실을 두고 이날 (8월 10일)의 축제가 구현하려던 혁명의 이상과 공화국 헌법의 위대성, 국민적 통합은 허구라고 주장한다.  '축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기대된 현실을 반영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프랑스는 대혁명 이후 교회가 고난을 겪게 된다. 교회 자체가 기득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교회가 없어진다 해도 뭔가 통합을 이룰 최고 존재는 필요했고 이런 필요성에서 급진적인 파견위원과 민중협회를 중심으로 일요일의 관행을 척결하고 새로운 십 일제 문화를 확립하려는 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일요일의 종교적 예배를 세속적인 예배로, 가톨릭 교회를 이성의 신전으로 개조하는 운동으로  니에브르의 푸셰는 1793년 9월 21일 한 성당에서 브루투스의 흉상제막식을 거행했고, 10월 22일에는 로마의 여신 베스타를 위한 이교적인 축제를 주관하는 일까지 있었다.


1793년 11월 10일 노트르담 성당에서 '이성의 축제'가 열렸다. 또 11월 23일 파리 코뮌은 파리의 모든 교회를 폐쇄하였고 다시 이틀 후 모든 교회를 '이성의 여신'에게 바치고 그 앞에 '이성의 신전'이라는 푯말을 걸었다. 


하지만 일부 혁명가의 생각은 달랐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화주의의 본질은 미덕이며 미덕을 위해서는 종교와 의례, 축제가 그 해답이라고 말한다. 그는 '종교적 감정은 사회적으로 유용하며 공공의 덕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라고 주장하고 심지어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고까지 주장하였다. 


이 당시 민중들(코르들리에 파)은 과격한 비기독교화 운동을 주도하며 이성의 축제를 확산시키고 있었다. 이런 운동에 대해 로베스피에르는 공화국의 신성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무신론자이며 동시에 조국의 배반자라고 비난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당시 민중들이 추구하던  카니발적인 이미지는 늘 새로운 의미를 지향하는 생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것이다. 혁명 엘리트들은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관점 모두에서 이 이미지를 싫어하였다. 정치적으로 그것은 정부를 위협하고 혁명을 선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1798년 7월 26, 27일에는 자유와 예술의 축제가 열렸는데 이때는 외국에서 약탈한 문화재를 프랑스로 가져오는 행렬이 축제에 포함되어 있었다.


저자는  대혁명 시기 혁명 기념일들이 추구한 자유와 국민과 같은 보편적 이념이 어떻게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이론으로 쓰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며  궁극적으로 혁명이 만들어 낸 '국민'이라고 하는 개념 속에 이미 제국주의적 배타성이 도사리고 있음을 암시하는 사례이기도 하다고 분석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 대혁명 이후 개최된 일련의 축제들은 '국민 만들기'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부상한  문화적 형식이었던 것이며 혁명가들은 이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저자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 정체성의 형성은 기억이나 기념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 며' 특히 집단 정체성은 그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념관이나 고문서, 축제, 의사록, 기념비, 신성한 장소, 역사책 등과 같은 문화적 형식을 통해 지속적으로 반복 학습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라고 밝힌다.


 이런 문화적 형식들이 아스만에 의하면 '문화적 기억'이고 일련의 프랑스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기억의 터'가 되는 셈이라는 것이다.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프랑스혁명 이후 개별 축제 속에서  즐겨 등장하던 여성과 고대 유물, 고대 영웅, 나무와 광대 등에 대한 상징성을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축제의 정치사 #프랑스대혁명 #윤선자#한길사#문화적기억#국민만들기#집단적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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