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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o Dec 08. 2024

'힘으로 짓밟힌 것' 끝나지 않은 피폭

한강 '소년이 온다'를 읽고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 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 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44년이 지났다.

아마도 사람들은 벌써 잊었거나 잊으라는 말을 할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놓지 않았다.

그날의 일을, 그날 사람들의 감정을 떠올리며 다른 누구보다 아파했을 작가는

아파도 놓지 않았다.


내 눈엔 작가라기보다 성직자로 보였다.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중요한 가치 앞에서 어떤 타협도 없이

묵묵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걸어가는.

맷집이 좋아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


누구보다 아프고 힘들어하면서

자신이 싸워야 하는 상대의 눈을 두 눈 부릅뜨고 쳐다보는 대신

어딘가 뭔가 초점 없는 눈을 하고서도

포기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 같다.


여리고 약한 걸음

그래서 상처란 상처를 몸으로 다 받아들이지만

결코 포기하지는 않기에.

어쩌면 그래서 더 단단한 영혼.


'소년이 온다'는 시와 소설의 어디쯤 있다.

내게는 광주 민주화 운동 희생자들에게 

바쳐지는 진혼곡으로 읽혔다.


'소년이 온다'는

우리를 1980년 5월 18일

그날, 그리고 그날 이후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와

갈등과 아픔과 상처를

'느끼게' 해준다.

'알게' 해주는 게 아니라

'느끼게' 해준다.


개인적으로 함께 많이 아팠던 대목들.

'여러 번 접어 해진 자국을 따라 손쉽게 접히는 종이처럼 의식의 한 부분이 그녀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그녀는 숨을 몰아쉰다. 어떻게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


국가의 폭력이 개인의 존엄성을 짓밟고

오랜 기간 은폐하고 왜곡하는 속에서

가족을, 이웃을 잃고

살아온 삶은 어떨까.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그저 겨울이 지나간 게 봄이 오드마는. 봄이 오면 늘 그랬드키 나는 다시 미치고, 여름이먼 지쳐서 시름시름 앓다가 가을에 겨우 숨을 쉬었다이. 그러다 겨울에는 삭신이 얼었다이. 아무리 무더운 여름이 다시 와도 땀이 안 나도록, 뼛속까지 심장까지 차가워졌다이.'


'소년이 온다'를 읽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이 무슨 역사의 비극인지 얼마 전 비상계엄이라는 사태가 발생했다.


생각보다 빠른 진화에 가슴을 쓸어내린 다음날 아침,

유튜브를 통해 본 광주 시민들의 반응에 나는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2024년의 대한민국을 예언이라도 하듯  말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우리는

1980년 광주의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그 어느때보다 절감하고 있다.

이제야말로 제대로 끝을 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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