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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o Apr 07. 2018

가볍게 봤다가 가슴 아파왔다

<B급 며느리>.

예고편만 보고 100퍼센트 공감했다.

'나는 이상한 여자와 결혼했다'라는 감독의 대사를 시작으로 시어머니에 대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조목조목 이야기하는 며느리의 모습이 보기만 해도 시원했다.


그래, 이젠 이런 영화 정도 나와 줘야지! 나는 지인들을 만나면 이 영화 예고편 봤냐고 물어봤고 우리는 영화를 보기도 전에 재미있겠다고 꼭 보자며 '대동단결'했다.


하지만 상영관에서 시간을 잡지 못해 놓치고 '봐야지'하면서도 가물가물 잊어버릴 뻔했던 영화다. 내 삶을 위로하고 싶어 지던 밤, <라라 랜드>를 보다가 한창 재미있을 때 노트북 맛이 가버리는 바람에 뚝 끊겨, 하필 영화도 내 운이 지지리 없는 날 이 모양인가, 이게 옴짝달싹 못 할 운명인가 기분 나빠지던 차에 생각난 영화다.


예고편에서 봤던 그 며느리의 전투력이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발칙한 며느리의 성공담일 줄 알았다. 그래서 뭔가 유쾌 상쾌 통쾌하게 흘러갈 줄 알았다.

하지만 영화는 오히려 내 생각보다 묵직했다. 그리고 가만히 가슴이 아파왔다.

어쩌면 참 별 거 아닌 걸... 왜 사람들은 스스로 울타리를 만들어 너도 나도 그 속에 가두는 것일까.


'B급 며느리' 진영 씨는 사법고시 1차 합격하고 시험을 준비하던 중 사귀던 남편과 임신해 결혼했다.

임신 초기만 해도 시댁 식구에 대한 인상은 좋았다. 사이좋게 화투도 치고 시어머니의 이런저런 조언을 신기하고 재미있게 들었던 모습이 나온다.

갈등의 첫 시작은 고양이였던 것 같다.

진영 씨가 기르는 고양이 2마리를 데려오면 결혼할 수 없다는 말을 시어머니가 했다.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진영 씨는 결혼하고 계속 고양이를 길렀다.


이제 2라운드는 아이에게서 시작됐다.

시어머니는 시댁에만 가면 며느리가 입힌 아이 옷을 갈아입히는 것이었다.

매번 이런 일이 반복되자 진영 씨는 불쾌해졌고 결국 시댁에 가는 발걸음을 멈췄다.

곤혹스러운 처지의 남편은 결국 이 스토리를 그대로 다큐로 만든 것이다.


며느리가 너무 전투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지만

나는, 그 젊은 며느리 진영 씨의 대사 하나하나가 가슴에 와 닿았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나를 싫어하지?"-> 진영 씨의 잘못은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거다. 시어머니가 아이 옷을 매번 갈아 입혀도 그러려니 하고 그대로 참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 큰 함정이 있다. 시어머니의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 행동은 내가 당했대도 기분이 나빴을 것 같다. 


며느리의 취향, 며느리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니까. 그리고 부정보다 더 나쁜 건 '며느리쯤은 부정해도 된다'는 생각이고 이 생각은 어쩌면 시어머니 고유의 것이 아닐 것이다. 오래전부터 사회적으로 학습되어온 부분이다."며느리는 식구다"라고 영화 속 시어머니도 얘기하지만 유독 이 식구에게만 '의무'가 한가득이다.


나이 어린 시동생에게 이름을 부르는 건 신선했다. 나도 생각지 못했다. 아마도 그런 경우를 당해보지 않아서일 거다. 처제에게는 반말하는 게 당연한데 남자의 동생에게는 '도련님'이라며 존댓말을 꼬박꼬박 써왔구나... 나도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관습이며 풍습이란 게 무섭구나 싶었다.


"결혼 전에 내가 얼마나 행복하고 건강한 사람이었는데""감독 마누라가 내 꿈은 아니었어"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취향이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아도 결혼 하나로 자연인 진영 씨의 인생은 많이 바뀌었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지 않을까. 

감독이 진영 씨 동생을 인터뷰한 부분이 흥미로웠는데 가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잘난' 딸이 어느새 반면교사로 바뀌었다는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생각만큼 유쾌 상쾌 통쾌한 며느리의 승전보는 아니었고 영화 후반으로 가면서 참으로 지루한 다툼이란 느낌이 들었지만 이 지루함이야말로 현실적 고부갈등의 모습이 아닐까 싶어 졌다.


부인과 엄마 사이의 싸움에서 양비론 펼치기 쉬울 남편이, 양비론을 펼치거나 회피하는 대신 카메라를 들이대고 정면으로 이 문제를 다뤘다는 점은 높이 사고 싶다.


감정이 격해지면서도 남편과 아들의 영화화에 솔직한 모습을 보여준 고부의 모습도 흥미로웠다.

우리나라에서 싸움이나 갈등은 피하고 싶은 것으로 흔히 여겨지지만 이 치열한 고부갈등 정면승부는 오히려 문제가 있는데도 없는 척하며 서로의 갈등을 곪게 놔두는 것보다 현명할 것이다.


엄마와 아빠가 싸울 때 어린 아들이 점잖게 한 마디씩 하는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엄마 닮아 벌써 말도 잘하는 것 같다. 

그래, 어리든 말든, 여자든 남자든, 며느리든 아들이든 할 말은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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