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판 신데렐라로 알려진 동화 <미녀 바실리사>에는 인형이 등장한다. 주인공 바실리사가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고 새엄마와 새 언니들을 맞게 된다. 새엄마와 새 언니들은 바실리사의 미모를 시기하며 구박한다. 집에서 하루 종일 집 안 일을 시킨다. 낮 동안 일 시킨 것도 모자라 저녁 무렵이면 밤을 새워도 해내지 못할 일들을 주문한다.
그런 바실리사에게 한 줄기 위안이 있었다면 엄마가 남겨준 인형이다. 하루 종일 집안 일과 구박에 시달리던 바실리사는 밤만 되면 인형에게 하소연한다. “새엄마와 언니가 오늘도 일을 하라고 했어. 저걸 내가 다할 수 있을까?”. 그러면 인형은 조용히 바실리사에게 속삭인다. “너무 걱정하지 마, 바실리사. 일단 좀 쉬어.” 지쳐 잠든 바실리사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면 어느새 바실리사가 해야 했던 일들이 감쪽같이 다 되어 있다. 바실리사의 인형이 한 일이다.
<미녀 바실리사> 속 인형은 인간이 인형에게 가지고 있는 많은 기대에 부응한다. 인형은 밤마다 우리를 재워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이면서 그렇게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을 ‘감쪽같이’ 해내는 능력자이자 마법사이다. 바실리사에게 인형은 또 엄마가 남긴 선물이자 엄마의 분신이었다.
남미 과테말라에는 걱정인형(worry doll)이 있다. ‘인형’이라는 표현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작은, 2~3 cm 남짓의 크기, 소재라야 흔한 작은 나뭇가지 같은 것에 실, 혹은 천으로 둘둘 말은 모양이 전부다. 하지만 아메리카 원주민 특유의 ‘애니미즘’적 사고가 들어간다. 과테말라 원주민들은 아이에게 말해왔다.
“걱정이 있으면 이 인형에다 말하렴. 그러면 인형이 네 걱정을 가지고 사라질 거야.”
과테말라 원주민들의 이 믿음은 인형과 함께 아이들을 안심시키는 마법을 부린다. 매일 밤 아이들은 작은 의식을 치르듯 자신의 걱정을 이 인형에게 털어놓고 베개 밑에 넣어둔 채 잔다. 단순한 그 행위 하나만으로 걱정은 이미 사라진다.
인형(人形)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작은 형상을 일컫는다. 우리식 표현으로는 동물 형상도 ‘인형’이라고 통용한다. 인류에게 인형은 친근하고도 특별하다. 인형은 우리에게 함께 놀이를 하는 친구가 되어 주기도 하고 옆에 있으면 든든한 수호신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신해서 들려주는 광대가 되기도 하고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 때문에 사람들이 가기 어려운 곳에 대신 보내 소원을 들어주기도 한다. 소원을 들어주지 못하더라도 사람들은 인형이 소원을 들어주리라고 믿는다. 그 믿음이 소원을 들어주는 효과를 갖는 셈이기도 하다.
어둡고 고독한 밤에도 인형이 필요하다. 좋아하는 인형을 끌어안고 자면 묘하게 안심이 된다. 바실리사에게 인형이 그랬듯 사무치도록 그리운 이를 대신해 주기도 한다. 인형은 고독함과 외로움이 숙명인 인간에겐 더없이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인형의 역사는 꽤 오래돼서 인류가 생활을 시작한 이래 인형이 있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돌, 흙, 나무, 구슬, 종이, 도자기, 가죽, 옥수수 껍질, 말린 과일 껍질, 헝겊 등 주변에 있는 재료라면 무엇으로든 인형을 만들어왔다. 인형을 만든 소재들을 살펴보면 ‘이렇게까지 인형을 만들어야 했나’ 싶다. 인형을 향한 인류의 갈구에는 어떤 절박감마저 느껴진다.
따지자면 사물이지만 그저 갖고 놀게 되는 소꿉놀이 기구나 다른 장난감 하고는 분명히 다른 무언가가 ‘인형’에는 있다. 바로 우리,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최초의 인형은 구석기시대인 B.C. 25000년께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Venus of Willendorf)를 꼽는다. 이 비너스 상은 돌로 만들어졌는데 높이 11cm가 안 되는 조그마한 여성의 모습이다. 누드 상으로 가슴과 배, 엉덩이가 유난히 강조된 풍만한 형태다.
인간이 아직 자연을 두려워하고 어려워할 때였다. 하루하루 그날의 양식을 해결해야 했던 인류는 동굴에 벽화를 그리면서 ‘사냥을 잘할 수 있기’를 기원하듯이 사냥에 필요한 아이를 많이 낳게 해 달라고, 또 식량이 풍부한 풍요로운 생활을 하게 해달라는 기원을 담아 비너스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 시대에까지 인형은 주술적이고 의식적인 용도로 많이 쓰인다. 죽은 사람의 묘지에 같이 묻어 저승 가는 길의 동반자, 혹은 하인으로 삼거나 신전에 인형을 바쳐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이르러 의식용으로만 쓰이던 인형은 점차 살아있는 인류의 친구가 되어간다. 이때 어른들은 어린이들에게 인형을 장난감용으로 주었다. 어린이들은 이 인형을 통해 역할놀이를 했다. 아이들에게 인형은 더없이 좋은 동반자였다. 자신은 지금 비록 어리지만, 그래서 어른들의 통제를 받지만 인형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상상과 만나서 어디로든 가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었다. 인형에 덧입혀진 상상은 아이들의 시간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인형은 아이들과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가까워졌다.
고대 중국에서는 그림자 인형이 발달했다. 얇은 동물 가죽에 채색을 한 뒤 투명한 막 형태의 무대 뒤편에서 조명을 받아 움직이면서 환상적인 움직임을 연출했다. 이 그림자 인형은 중동을 비롯해 서구 유럽에까지 전파되면서 또 다른 형태의 인형들을 낳았다.
르네상스를 지나면서 인형은 본격적으로 인류의 생활 속에 들어온다. 귀하고 예쁜 인형을 만들고 수집하는 것은 유럽 귀족들의 호사스러운 취미가 되었고 인형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소재로 만들어진다. 도자기와 포슬린 소재로 만들되 양 볼에 불그스레 홍조를 띤 인형으로 조형미를 살리고 당시 귀족들의 옷차림인 인간을 축소한 인형에 대한 관심은 이제 인형의 집을 만드는 데 이른다. ‘실제 같은, 더 실제 같은’ 인형에의 집착이 이어진다.
18~19세기에 이르러 유럽에서의 인형은 대중화된다. 도자기로 만들어지던 인형은 새롭고 경제적인 플라스틱 재질이 나오면서 대량으로 생산된다. 20세기에는 대중적인 인형 브랜드들이 생겨나고 세계적인 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사람의 옆에 머문 시간이 길었던 만큼 인형은 어느새 사람들에게 많은 역할을 부여받아 왔다. 무엇보다 인간의 바로 옆이라는 위치 때문에 인형은 친구이자 아이일 수 있었다. 아이에게도 ‘아이’ 같은 존재가 바로 인형이다. 인형은 사람의 바로 옆에 있기에 사람의 말을 들어주고 ‘돌봄’을 받는 존재이지만 거꾸로 사람을 ‘돌봐’ 주기도 한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유한성 때문에 불가능한 일도 인형에게는 가능하게 여겨진다. 인형은 그렇게 충직하고 든든하면서 신비로운 존재로 인간 옆에 있다.
그 오랜 시간 인형은 사람 옆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변해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