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대화의 격률 : 질의 격률 maxim of quality
질의 격률은 대화의 진실성과 관련이 있는데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신뢰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질의 격률은 대화의 전제와도 같다. 학문으로써 자기 노출을 처음으로 연구한 쥬라드 S.M.Jourard는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진정한 공감을 구하지 못해 인간관계를 맺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때 솔직해야 하는 것은 비단 나를 둘러싼 사실만이 아니다. 내가 느끼는 감정에도 항상 진실해야 한다. 관계의 질은 때때로 사실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감정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하는 대로 대화가 잘 풀리지 않으면 표현력이 부족하거나 전달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말로 정확하게 설명한다고해서 상대방이 항상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서는 설명하면 할수록 상황이 더 복잡해지거나 잔소리가 되어 상대방의 귀를 막아버리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상대방에 대한 공감이나 진심이 없이 자신의 목적에 따라 일방적으로 이끌어가려고하면 대화는 십중팔구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든 사실을 말과 행동으로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의사소통의 강박관념을 내려놓고 진심을 전달할 때 상대방의 귀가 열린다.
효율적인 대화법을 익히는 것이 더 나은 관계를 맺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강의에서 실습했던 몇 개 안 되는 대화법으로 우리의 삶이 변한 것은 아니다. 학습한 것을 적용하려고 상대방의 표정과 몸짓을 살피고,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애쓰는 과정에서 서로의 ‘마음’을 살피는 일이 일어난다. 말 그대로 진정성이다. 진심이 없으면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 ‘대화’이고 ‘관계’다.
지난주부터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화되면서 다시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잰걸음으로 40분 정도 걸었더니 짧은 코스 하나가 금방 끝이 났다. 이젠 익숙해져서인지 이 정도는 거뜬하다. 이 길이 처음부터 이렇게 편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돌부리도 흙더미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일부러 땅만 보고 걷는 것도 아닌데 이제는 어디 걸려서 넘어질 일도 없다.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인사를 나누는 여유도 생겼다.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는 과정이 등산로에 익숙해지는 것과 비슷한 데가 있다. 친밀한 관계가 편안한 것은 서로에게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 익숙함은 마냥 좋은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에게서 자신의 약한 모습을 문득 발견할 때 연민의 정이 생기고, 별것 아닌 일에 발끈하는 상대방을 보면 화가 났다가도 뒤돌아서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완벽해 보이던 상대가 실수하는 것을 보면 그의 사람 냄새에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 사람의 모난 구석도, 허당같은 면도 익숙해지면 편안해진다. ‘미운 정도 정’이라는 말은 여기서도 통한다.
누군가와 편해지고 싶다면 상대방이 나의 솔직한 모습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용기가 필요하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꾸며내는 모습은 늘 종잡을 수가 없어서 불편하다. 매번 서로의 장단을 맞추느라 관계에 힘이 들어간다. 어디에 돌부리가 숨었는지, 내가 혹시 걸려 넘어지지는 않을지, 상대가 상처받지는 않을지, 이런저런 생각들로 항상 조바심을 내야하는 관계는 항상 겉돌수 밖에 없다. 서로에게 깊이 연결되려면 무엇보다 서로에게 솔직해야 한다. 내가 진심이 아니면, 상대도 진심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