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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진 코치 Sep 01. 2020

진심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


L은 지방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지금은 분가하여 아내와 함께 서울로 이사했다. 일찍 혼자가 되신 그의 어머니는 젊어서는 재가하라는 주변의 권유도 많았지만 아들딸을 돌보느라 좋은 시절을 혼자서 다 보내셨다. 세월이 한참 흘렀으니 그 당시 마흔에 낳은 늦둥이 외아들이 얼마나 귀했을지는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L은 밤바다를 무서워한다. 유난히 추웠던 어느 겨울날, 어머니가 자신을 업고 밤바다를 헤매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어서다. 그의 어머니가 그렇게 어려운 시절을 버텨내며 애지중지 아들을 키워낸 덕분에 지금은 며느리와 세식구가 웃으며 옛 일을 추억할 수 있게 되었다.






간혹 일찍 혼자가 된 부모들 중에는 당신의 굴곡진 인생을 자식 탓으로 돌리고 자식의 죄책감으로 한평생을 위안받으며 사는 불행한 경우도 더러 있다. 하지만 L의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로 아들 부부의 마음을 다치게 한 적이 없다. 그녀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가족들만 바라보고 산 세월이 전부였다. 남겨진 유산은 생활비와 이런저런 명목으로 다 썼고 시집 간 큰 딸에게 조금 보탠 것 외에는 자식에게 남길 것이 없었다. 재벌총수도 병실에서는 외롭게 죽어간다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자식들이 '우리 어머니 보고 싶다' '감사하다' 하는 것 보면 어머니도 참 잘 사셨다. 



이 사연을 이렇게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은 내가 그 집안의 유일한 며느리이기 때문이다. 곧 아흔을 바라보시는 어머님은 여전히 40대 아들 부부를 쥐락펴락하신다. 10년 넘게 무뚝뚝한 여장부의 모습만 보아 온 며느리로서는 어머니가 남편에게는 늘 따뜻한 엄마였다는 증언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어디서 이렇게 다정 다감한 아들이 나왔는지가 항상 의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말 한마디로 한꺼번에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괜찮아~ 어머니는 내 맘 다 아셔.




남편과 어머님 사이에는 서로를 향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다. ‘온전한 내 편’,‘과장하거나 설명할 이유가 없는 진심’이다. 아이가 길을 걷다 넘어지면 길바닥을 ‘맴매’하는 엄마의 마음이다. 세련되고 다정다감하게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진심이 달라지는 일은 없다. 남편이 군에 입대하던 날도 어머니는 호탕하게 웃으시며 혼자서 외아들을 군에 보내셨다고 한다. 남편이 반주 한 잔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그날의  이야기를 꺼낸다. 만일 어머니가 전봇대 뒤에서 몰래 아들을 지켜보는 모습을 들키지 않았더라도 아들은 어머니의  그 마음을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진심은 통한다. ‘진실은 밝혀진다.’ ’라는 말이 가끔 상황을 회피하려는 비겁한 표현으로 둔갑할 때가 있다. 그야말로 진심이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조차 함부로 ‘진심’을 남용하는 안타까운 사연을 너무 많이 만났다. 그러나 ‘진심’은 우리가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감각이다. 누군가와 함께일 때 내가 참 ‘나답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순간만큼은 서로에게 진심임이 틀림없다. 관계에서 통하는 진심이란 ‘거짓이 아닌 사실’을 말하는 것을 넘어 서로의 말과 행동에서 따뜻한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신랑이 그 날 저녁상에서 알려준 ‘진심’은 내가 어머님을 진심으로 대하게 하고 내 엄마를 더 사랑하게 해 준 고마운 말이다. 



법정 스님의 잠언집에는 ‘만남의 관계’와 ‘스침의 관계’라는 표현이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와 당신이 만나서 서로의 내면을 주고받는 관계는 ‘만남’이라 부르지만, 서로의 가면이 만나서 역할만을 수행하는 피상적인 관계는 ‘스침’에 불과하다. 아직 진정한 나를 나눌 준비가 되지 않았거나, 거절이 두려워 진정한 내 모습으로 상대방에게 다가서지 못한다면 날마다 만나도 그 관계는 ‘만남’이 아닌 ‘스침’이다. 스침을 만남으로 이어주는 것이 바로 진심이다. 



사람들을 이어주는 매체가 다양해지고 관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도 많이 달라졌다. 과거 ‘끈끈한 우리’를 대신해 ‘느슨한 연대’가 자리 잡았다. 소통의 창구가 다양해지고 전보다 쉽게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질 수 있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점점 혼자가 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비슷한 사람들과 비슷한 것들만 공유하며 그들만의 세상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앞으로의 관계는 분명 우리가 지금까지 알던 것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다만, 어느 시대에도 ‘진심’이라는 그 뿌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에게 깊이 연결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견고한 ‘관계(關係)’가 삶의 양분을 끌어 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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