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재부팅 ㅣ 잘 안될 땐, 껐다 켜기.
H의 노트북이 또 말썽이다. 내장된 프로그램으로 온갖 진단을 하고 여기저기서 백신 프로그램을 내려받았다. 워드 설정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워드를 새로 깔고 드라이버도 다시 설치했지만,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컴퓨터를 잘 아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무심한 듯 껐다가 켜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전공자 치고는 원시적인 방법을 알려주긴 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던 그녀는 일단 전원을 끄고 조금 기다려보기로 했다. 잠시 노트북을 꺼놓는 동안 어질러진 책상을 치우고 가볍게 스트레칭도 했다. 밤새 혼자뿐이었는데 책과 메모지, 온갖 낙서로 방 안이 폭격을 맞은 것 같다.
잠시 후 다시 전원을 켜니 프린터 설정이며 밤새도록 버벅대던 인터넷까지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인터넷을 바꿀 때가 됐다고 씩씩거리면서 온갖 백신프로그램을 설치했는데 다 쓸데없는 짓이었다니 허탈함이 밀려왔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 물어보니 이번에는 제법 그럴듯한 답을 한다. 메모리가 가득 찬 상태에서 내장된 프로그램으로 아무리 문제를 진단한들 워드 설정이 잘못되었다는 둥 엉뚱한 분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잘 안되면, 껐다 켜세요.
세계보건기구(WHO)가 2019년 5월 제11차 국제질병 표준분류기준(ICD-11)에서 번아웃(burn -out)을 직업 관련 증후군으로 규정했다. 이를 기점으로 지금까지 일 좀 한다는 사람들의 훈장처럼 여겨지던 번아웃이 자기관리의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번아웃’은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누적된 피로감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극도의 무기력을 경험하는 현상’을 말한다. 과거에는 이러한 증상이 감정노동이 심한 서비스직이나 실수가 허용되지 않는 예민한 업무를 다루는 직업군에서 주로 나타났지만 최근 번아웃으로 신경정신과를 찾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유튜버나 작가, 강사와 같은 프리랜서라고 한다. 많은 시간을 투자했지만 결과가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사회적으로도 성과를 인정받지 못할 때 극도의 무력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증상은 경쟁에서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시작되어 단기간에 과도한 성취를 이루려고 애쓰거나 성취가 새로운 동기부여를 끌어낼 만큼 충분하지 못할 때 그 증상이 더욱 심해진다.
완벽주의자는 결과물이 자신의 기준에 부합할 때까지 손에서 놓지 못한다. 그러나 객관적인 자신의 한계를 수용하지 못하거나 ‘세상에는 없는 완벽함’이 그 기준이라면 끝내 몸과 마음을 메모리가 꽉 찬 상태로까지 몰아넣을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자신을 태우다가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되어 버리는 시점burn-out에 무기력과 공허함이 한꺼번에 몰려오면 이겨낼 방법이 없다. 이때 항상 자신에게 채찍질만 했던 사람은 절대로 혼자 일어날 수가 없다. 컴퓨터는 그냥 껐다 켜면 되지만 사람은 한없이 토닥여 주어야 한다. 잠시 쉬고 나면 몸은 조금 회복되지만, 마음은 저절로 나아지지 않는다. 상담사를 찾거나 타로점을 보아도 다른 사람에게서 제대로 위로받기는 어렵다. 스스로 괜찮다고 조금 쉬어가도 된다고 수없이 토닥여 주면 그제야 혼자 일어설 힘을 얻는다. 나르시시스트에게 부족한 것이 타인을 향한 공감이라면, 완벽주의자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향한 공감이다. 스스로 충분히 회복되지 않으면 잘못된 생각으로 상대방을 오해하고, 이 때문에 서로에게 원치 않는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자신의 생각 회로가 망가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이러쿵저러쿵 잘못된 진단을 내리게 된다. 누군가와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다른 사람을 돌보기 전에 자신를 돌보는 일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로하듯
나를 위로하는 연습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