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을 보러 서점에 들렀는데 유독 눈에 띄는 책이 한 권 있다. 경제/경영 코너에 관상학이다. '사람 보는 눈'을 키워준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 걸었다. 귓불은 두툼하고 이마가 넓고 광이 나야 관운이 있다는 식의 뻔한 스토리를 예상했지만 호기심에 열어본 책 속에는 저자가 오랫동안 고민한 흔적과 그의 내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책장을 열어 확인하지 않았다면 그 책은 나에게 영영 경제/경영 코너에 어울리지 않는 미신 이야기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선입견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으면 편견으로 굳어진다. 선입견이 합리화를 거쳐 편견이 되고 나면 그 생각이 옳다고 착각하고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누가 들어도 이상한 ‘라떼 부장님’의 생각에 누구도 토를 달지 않을 때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라떼 부장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 뇌는 매번 생각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기위해 세상을 인식하는 기본적인 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틀에 맞지 않는 사실은 무시하고 기존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사실에 먼저 빈응하기 마련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흔히 말하는 ‘확증편향’이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거봐, 내 말대로잖아.’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을 돌아보면 생각이 편견으로 굳어지는 과정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편견이 '사람 보는 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가 세상을 인식할 때 각자의 경험이 만들어 낸 인식의 틀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는다. 그래서 우리의 눈과 귀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는다고 착각한다. ‘칸쵸’ 뒷면에 인쇄된 숨은그림찾기에서 망치, 압정, 나들이 모자 같은 것도 제대로 못 보고 지나쳤으면서 자신의 ‘세상 보는 눈’은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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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부서이동을 한 영업사원 S는 동료들사이에서 ‘하극상’으로 통한다. 누가 불러도 무표정한 얼굴로 무성의하게 대답한다며 누군가 그에게 관상이 ‘하극상’이라는 웃픈(우습고 슬픈) 별명을 붙였다. 그도 동료들의 달갑지 않은 시선을 눈치 챘는지 업무상 꼭 필요한 말이 아니라면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다. 모두들 쉬쉬하며 은근히 그를 따돌리던 어느 날, 잔뜩 화가 난 고객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모두가 숨죽이며 일촉즉발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때, 그는 즉시 고객에게 다가가 상냥한 말투로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를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것과는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원래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인데 부서를 이동한 후로 줄곧 옆자리 동료가 던지는 농담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마음을 졸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간 내색도 못하고 얼마나 맘고생을 했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무엇이든 관심을 가지고 계속 관찰하다 보면 그것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는 순간이 있다. 마치 숨은그림찾기에서 이전에는 없던 것이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말이다. 이런 발견을 ‘사람 보는 눈’에도 그대로 적용해 볼 수 있다. 상대에게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면 이전엔 몰랐던 새로운 존재가 눈앞에 나타난다. 진정한 관심이 다양한 관점을 만들고 여기에 상대방의 선한 의도를 믿는 마음이 더해질 때 관계가 시작된다. 자신만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상대방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람 보는 눈’은 다음의 두 가지 노력을 통해 발전한다. 첫째는 ‘상대방의 인간적인 선함을 보려는 노력’이고, 둘째는 ‘다양한 관점으로 상대를 보려는 노력’ 이다. 이러한 노력은 서로 영향을 주며 관점을 발전시킨다. 우리는 관계를 맺으며 상대방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관계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편견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러한 편견을 바로잡는 데는 다시 관계가 필요하다. 이것은 혼자만의 성찰로는 불가능하다. ‘사람 보는 눈’은 혼자서 상대방을 이리저리 재어 보는 것으로 나아지지 않는다. ‘사람 보는 눈’은 다른 사람과 직접 관계 맺으며 경험적으로 얻어지는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