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맥주 한 캔씩을 들고 드라마를 보는데 엉뚱한 장면이 몰입을 방해한다. 교통사고로 죽은 아버지가 살아있는 큰 딸과 나란히 벤치에 앉아있는 장면이었다. 설정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무심코 남편을 툭 치며 웃었다. 그냥 옆구리를 쿡 찔렀을 뿐인데 갑자기 남편의 어깨가 들썩들썩한다. 깜빡 잊고 있었다. 오래전에도 먼 친척의 장례식에서 남편이 갑자기 서럽게 우는 바람에 크게 당황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또 잊었구나 싶어서 아차했다.
남편은 아주 어릴 때 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다. 비슷한 상황이 떠오를 때마다 남편에게는 문득문득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어깨를 토닥토닥하다가, 결국은 둘이 부둥켜안고 눈이 퉁퉁 부을 때까지 실컷 울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두세 번씩 숨이 차오르는 바람에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어야 했다. 마음이 조금 가라앉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걸었다. 늘 그렇듯 잔소리 폭격이 쏟아졌다. 아침, 점심, 저녁상에는 어떤 반찬이 올라왔는지부터 아이는 언제 낳을 건지, 어떻게 키울 것인지, 질문과 답변까지 십수년째 똑같은 레퍼토리가 쉴새없이 쏟아져나왔다. 양쪽 귀를 번갈아 가며 전화를 받았더니 양쪽 귀가 뜨끈뜨근 얼얼했다. 서로 눈을 찡긋하고는 용돈 조금 보냈으니 맛있는 거 사드시라고 다음 주말에는 내려가겠다고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귀에서 피가 나는 것 같지만
그래도 감사합니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힘든 상황을 쉽게 잊어버리기도 하고 가끔은 애써 덮어두기도 하면서 그럭저럭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런데 고통에 적응하는 이런 능력은 정반대의 상황에서도 똑같이 발휘된다. 행복에도 마찬가지로 너무 쉽게 적응해 버리는 것이다. 단칸방에 살 때는 주방에 칸막이만 있어도 좋을 것 같더니 지금은 방이 세 칸인데도 비좁다. 큰 방에 침대를 들여놓고, 하나는 내 공부방, 나머지는 드레스룸을 꾸미고 나니 서재가 없어서 아쉽다. 한때는 나에게 절실했던 것들이 어느 순간 당연한 것들이 되어있었다. 나는 어느새 당연한 행복에 적응해 버렸다.
우리는 가끔 더 높은 목표,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느라 지금의 행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카사노바는 잡은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자신이 가진 것들을 소홀히 대하다가 모든 것이 한순간에 떠나버리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제서야 잠깐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대부분 한 박자 늦은 후회다. 감사하는 습관은 우리가 행복에 ‘적응’하지 않도록 돕는 가장 구체적인 실천법이다. 소중한 사람들과 당연한 듯 누리는 이 모든 일상이 바로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