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한 관점 detached perspective : 무관심의 영역
감정적 무관심 / 불신
전지적 관점 -> (부정적) 편견
최근 브런치에서 에세이를 한 편 읽었다. 지하철 계단에서 넘어진 노인과 그를 밀친 청년에 관한 이야기였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노인을 밀친 것처럼 보이는 청년의 사연도 안타까운 데다가 넘어진 노인을 무심히 지나쳐 온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신학을 공부한 작가의 글에는 늘 사람을 향한 좋은 마음이 느껴진다. 읽는 내내 두 사람에 대한 연민이 느껴졌지만 나 역시 현실에서는 분노든 연민이든 강렬한 감정을 느끼고도 전혀 개입하지 않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바쁘게 계단을 오르내리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그 노인을 일으켜 세웠거나 청년을 붙들어 세웠더라도 그런 행동이 항상 훈훈한 결말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은 오히려 자기 일 아니면 신경끄라는 험한 말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느새 우리는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는 상황조차 무심하게 지나치는데 익숙해져 버렸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어쩌다 한번 만나는 고객에게는 더없이 따뜻하고 친절하지만, 매일 만나는 리셉션 직원이나 로비를 정리하시는 여사님과 나누는 눈인사에는 한없이 인색한 사람들도 있다. 마치 자신의 귀한 감정을 아무 데나 소모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있는듯하다.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지 자신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상관없다는 ‘무심한 관점’이 관계에서 거리를 만든다. 배려하는 마음이 괜한 ‘오지랖’으로 오해받을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파티션 너머의 동료와 가까워질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꼭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다. 실제로 사람의 에너지는 한정적이어서 어디엔가 사용하면 반드시 다시 채워 넣어야 하지만, 감정을 표현하는 것만은 예외다. 감정은 여러 사람과 공유할수록 긍정적인 에너지가 증폭된다.
‘무심한 관점’은 선입견에 휘둘리기도 쉽다. 사람의 마음을 읽고 다양한 관점으로 헤아리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이것을 오로지 타인을 위해 감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선뜻 귀한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한 두 번의 경험으로 상대방을 속단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전부라고 믿어버리고 손쉽게 결론 내린다. 이때의 선입견은 부정적인 편견으로 흐르기 쉽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경솔해지면 어디선가 그 사람에 관해 들은 이야기를 별 생각 없이 전하기도 한다. ‘내가 들었는데’로 시작하는 무책임한 말은 상대방의 의도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심지어 자기 생각도 들어있지 않다. 우리가 그의 ‘선한 의도’를 조금이라도 마음에 두었다면 뜬 소문은 아예 만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떠다니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꾸며내거나 들은 대로 전할 뿐이라는 무책임한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사람은 단지 경솔하다는 말로도 포장될 수 없다.
직접적으로 대면할 기회가 많지 않거나 자주 만나더라도 서로에게 깊이 관여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에 관계를 보는 눈은 ‘무심한 관점’에 머무르기 쉽다. 같은 사무실로 출근하여 매일 마주치더라도 관계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흔히 이런 관점을 경험하게 된다.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며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 상대방의 무심한 태도에 서로가 무덤덤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 나눈 바와 같이 관계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건강을 “단순히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닌,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으로 온전한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사회적인 ‘온전함’을 결정하는 요소가 바로 타인과의 관계다.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로버트 월딩어는 인간관계가 건강과 행복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최초의 연구 대상 724명 중 60여 명이 생존하여 지금도 연구에 참여하고 있는데, 이 조사를 시작할 때 참가자 대부분은 삶의 목적을 부와 명예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이 50대 후반이 되었을 때, 건강한 삶의 첫 번째 조건으로 ‘인간관계’를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행복해지는 비결은 역설적이게도 상대방에게 진정한 관심을 쏟는 것이다.
일터에서뿐만 아니라 가깝게는 이웃과의 관계도 별반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은 필요에 따라 선택한다는 각박한 원칙에 우리가 너무 익숙해진 탓이다. 오랫동안 우리의 관계를 무심한 관점으로 방치해 두었다면 지금 우리에게는 다시 시작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눈앞의 일들에 온통 마음이 뺏겨있을 때 뭔가 새롭게 시작하는 용기를 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일단 용기를 내면 우리 주변은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해진다. 그리고 마음은 한번 통하면 웬만해선 그 길이 다시 막히지 않는다.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동화극 ‘파랑새’에서는 파랑새를 찾아 꿈길을 헤매던 남매가 결국은 자기 집 새장에서 새를 발견한다. 항상 그 곳에 있어도 마음을 쏟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정을 ‘퍽퍽하다’하지 않고 ‘끈끈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기 때문이다. 그 끈끈함을 제대로 느끼고나면 그 때부터는 관계가 주는 마음의 여유를 경험으로 알게 된다.
to be continued... '맹목적 관점'과 뒷 이야기